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행 25:8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시 137:2-3
늘 우린 어떤 결정 앞에 서야 한다. 매순간이 그에 연속이다. 할 때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 할 때 선택지가 여러 개라 해도 단순해진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보면 항상 ‘먼저와 나중’의 원리인데, 우린 늘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먼저 둔다. 당장 이로운 일에 먼저 의미를 둔다.
오늘 바울은 선택해야 한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심문을 받을 것인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인가? 할 때(9-10), 바울의 기준은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8).” 하는 것으로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11).”
바울은 2년간 구류 상태로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을 재고소하였다. 저들은 예루살렘으로 바울을 보내주길 청했다. 호송할 때 암살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로마로 가서 가이사 앞에 서기를 바랐다. 이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로마 전도의 문을 열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 23:11).” 저는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맡기신 바 충성된 자를 찾으신다. 세상 권력은 하나님께로 났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우리가 살면서 이 땅의 것에 순복함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잠 11:3).” 우리의 성실은 기본이다.
지혜자의 주장은 일관되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22:29).” 그러므로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27:23).” 그러할 때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25:13).” 이에 주님은 비유로 말씀하시길,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어떤 선택에 앞서 우리의 악함을 인정해야 한다. 이에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잠 22:24-25).” 그로 인하여 여전히 그 마음에 울분이 있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자와는 거리를 둬야 한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19:20-21).” 이를 인정하는 데서 선택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분을 내지 않을 수는 없으나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곧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이를 위해서도 우린 자신을 이겨야 한다.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좋은 행실은 항상 나쁜 습관을 이긴 결과이다. 나쁜 습관은 들풀과 같아서 뿌리를 뽑고 뽑아도 조금만 방심하면 다시 또 수북하게 자라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1-32).”
이를 행하는 데 있어서는 항상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게 필요하다. 우린 늘 상대의 호의를 호구로 삼으려 한다. 선의를 악용하기 일쑤다. ‘호의’의 어원은 ‘카리스’로 은혜를 뜻한다. 은혜는 선물이다. 고로 지혜자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곧 우리가 주 앞에 자신을 인정하는 일은 모든 선택권, 자유의지를 주께 내어드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사 64:5).”
주 앞에 자복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현실을 사는 일, 마주하는 선택의 길목에서 주의 뜻을 기준으로 하는 것.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8-9).”
밤 사이 장문의 문자가 들어와 있다. 그리고 한 편의 글도 올라와 있다. 아이보다 아이엄마의 글과 그 내용이 적극적이라 뜻밖이기는 하다. 묻기를 특별반을 운영하는 학교로 전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 같다. 여러모로 그곳에서 아이에게 맞는 교육과 환경에서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앞서 나는 일반학교에서 일반 아이들과 섞여 생활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 선정대상에 아이가 뽑힌 것인데, 나의 우려는 더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과 같이 수업을 하고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지능이 낮을 뿐 그렇게까지 사리분별이 어렵지는 않다. 비록 일반(?)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늦되다 하나 그런 가운데서도 사회성은 생겨난다.
자신보다 못한, 더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은 괴팍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아이는 현재보다 위축되어 스스로를 더욱 저해할 수 있다. 물론 아이에게 맞는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설명인데, 글쎄…. 나 역시 어느 쪽으로의 결정이 옳은지는, 서로 장단점이 있어 어렵다. 선뜻 내 의견을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후에는 저의 원망이 돌아올 게 뻔하다. 그래서 나는 주 앞에 이 문제를 내어놓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문제는 선택이 아니라 엄마 그 자신이다.
올린 글에서 본인은 밤늦게까지 유튜브로 드라마를 본다. 현실을 잊고 드라마 주인공이 되어 헛된 망상에 젖으면 위로를 얻는다. 그럼 또 보나마나 다음 날은 늦은 시간까지 늘어져 자야 할 테고, 피로가 누적되어 종일 다른 일에 의욕이 없을 것은 뻔하다. 그러면서 과연 저이가 자신의 이러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결단할 수 있을까? 하물며 아이로 장애 등급을 받고, 특별반에 넣고, 특별교육을 받게 한다고 한들… 엄마가 여전하여 그대로이면 어떤 결정도 장담할 수 없다. 나는 이 말을 가감 없이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조심스러운 것은 우리가 다 알듯이 ‘그런 상태’는 몰라서가 문제가 아니다. 알면서도 그리하는 게 문제다. 스스로들 안다. 그러면서 현실을 운운하고 누구 탓을 한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두고 나는 과연 얼마나 이 한 날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가? 내 곁의 아무개를 또는 누구의 어떤 문제를 주가 맡기신 일로 여기며 살고 있는지! 더는 뭐라 해도 소용없을 때 나는 난감해진다. 더는 '사모 내외'에게 뭐라 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본인들이 알면서도 결정한 것이다. 내가 안달한다고 해서 바뀔 리 없다. 이번 일도 아이를 이쪽 학교에 그냥 둘 것인지, 특별반을 운영하는 학교로 전학을 시킬 것인지가 문제가 아니다! 실제 그 문제보다 앞서는 것은 엄마 자신이다. 나는 이를 어찌 말해주어야 할 지, 내가 결정해줄 수는 없다.
세상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오늘 시편과 같이 우리의 삶은 바벨론에 끌려온 것과 같다. 세상은 우릴 정죄한다. 그러할 때 우리의 당당함은 주 예수가 우릴 위해 모든 죄를 사하심으로 우리가 승리하였다는 것이다. 곧 오늘 우리의 평안은 주를 신뢰함에서 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때,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17:3-5).
주를 의뢰한다는 것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그럴 때 욥과 같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설령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를 의지하겠다는 것, 결국 오늘이 어쩌니 해도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4-16).”
주를 바람으로 오늘을 이길 수 있다. 내 안의 나쁜 습관과 못된 습성을 벗어던질 수 있다. 주가 아니시면 스스로 더욱 완고하여질 뿐이다. 결국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그러니 결단해야 한다. 오죽하니 바울은 나이 들어서도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하였겠나?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사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주를 멀리하거나 버림당할까 두려워할 줄 아는 게 힘이다. 하여,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137:1-3).
믿는 자로 살면서 안 믿는 자의 장단에 맞춰 노래할 것인가?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4).
아이엄마는 내게 물으며 어찌할까? 답을 요구하였다. 나에게는 답이 없다. 아이가 현재 그 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게 나을지, 특별교육이 가능하다는 ‘그런 아이들’과 어울려 반편성을 받는 게 나을지… 결론은 아이엄마라! 토요일에도 나는 다그치듯 말했다. 아이 걱정보다 엄마나 먼저 바로 서시라. 신학까지 한 이의 오늘의 삶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가되는 게 아닌가? 어쩌다 조현까지 걸리게 된 것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한 상황을 인정할 때, 그 바탕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함으로 오늘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라! 아이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시라! 아이는 또한 아이의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119:96-97).
그러할 때,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64).
과연 오늘을 살면서 우린 몇 번이나 주의 의로우심을 체득하고 느껴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고 있는지?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 40:7-8).”
이에,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9:7-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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