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 26:13-14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시 138:7
우려와 염려가 앞선다. 사람 참 연약하고 잔인하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더러 그의 짐을 나눠지는 일이다. 그러다 저의 모든 짐을 대신 지는 경우도 생기는데, 서로가 좋았던 사이는 힘이 없다. 금세 자기 유익을 구하며 병적으로 자기방어를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우리로 이 땅에서 ‘천국의 맛’을 알게 하시고자 잔치를 베푸신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깊이와 너비와 높이와 길이를 가늠하게 한다. 세상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저들에게 부여하신 권한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늘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 자신의 걸어온 날을 진술한다. 굳이 그렇게 구구절절 상세히 말할 이유가 있을까? 싶을 정도인데 저는 그 말을 듣는 이들이 누구라도 자기 같이 되기를 바라서이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행 26:29).” 할 때, 나와 같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주의 나라를 사모하기까지 복음을 사랑하고 증거하고자 함인데,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3-14).”
저는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가리거나 거짓으로 숨기지 않는다. 주 앞에 자복하고 사람 앞에 인정하는 데서 주의 역사하심이 강해진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과 같이 비하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를 아가서의 사랑 노래로 들어보면,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아 2:1).”
‘사론’은 팔레스틴 지역의 서부에 위치한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의 욥바에서 북쪽 갈멜산 지역에 이르는 거대한 평원지다. 남북이 약 80여km, 동서가 10-19km에 달하는 넓은 지역으로, 이곳에는 많은 풀들이 자라며 북부는 농경지(사 65:10), 남부는 목초지(대상 27:29)로 유명하다.
‘수선화’는 ‘백합화’로도 번역되는데,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 35:1-2).” 곧 가을에 심고 겨울을 땅 속에서 지내다가 봄에 꽃을 피우는 수선화과의 다년초생물이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예루살렘 왕궁의 많은 다른 궁녀들과 달리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여자로 인정하고 겸손히 표현하였다. 이에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할 때, ‘백합화’는 레바논이나 팔레스틴 지역에 자생하는 것으로, 성경에서 성전의 기둥이나 물두멍에 장식 꽃으로 쓰였다(왕상 7:19, 22, 26, 대하 4:5). 곧 자신을 골짜기 인적이 드물고 잘 보이지도 않는 외진지역의 백합화 같은 존재로 별 볼 일 없음을 아뢴다.
그러나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아 2:2).” 그러나 왕은 술람미 여인을 ‘가시나무 같은 여자’들 가운데 백합화로 핀 ‘고귀한 여인’이라 칭찬한다. 이는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곧 우리의 자기고백은 그 부끄러움과 수치를 개의치 않고 주 앞에 인정함으로써 겸손한 자로 은혜를 더하신다.
우리는 모두 죄 가운데 사로잡혀 살고 있으나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우리의 결국은 뒤엎으신 주의 은혜 앞에 겸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1).”
이런 의미에서 오늘 바울은 자신이 잡힌 것 외에 모두가 자신과 같이 주의 사랑을 알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로 서기를 바랐다. 이는 우리가 맺어가야 할 성령의 열매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비록 로마 법정에 서서 변론해야 하는 처지이나 그 또한 주를 나타내는 것으로 한껏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주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으로, 상한 심령을 돌이켜 영적으로 치유하는 일이다. 곧 우린 저마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산다. 나의 이런저런 아픔과 슬픔이 오히려 주를 나타내는 데 유익하여서, 상대는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밝히고 이를 직면하며 어쩌다 그와 같은 일이 생겨났는지를 직고한다. 누구의 직설적인 글쓰기에 순간 당황하고 놀라워하다가도 그러한 과정 뒤에 자신을 겸손히 주 앞에 내어놓을 수 있을 것을 믿는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우리는 저마다 이런저런 사연과 남모르는 고통을 안고 산다. 이를 안으로 품어 홀로 지고 갈 때는 부풀려져 끝 간 데 없이 억울함은 재생산되나 주를 인정할 때 나의 나 됨을 감사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러할 때,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아 2:3).”
곧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다’는 것은 겨울에도 그 잎이 떨어지지 않고 푸르른 상록수를 일컫는 시트론(citron)으로 살구나무로도 이해된다. 사과나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소중히 여겨지던 것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친 들판의 초목이나 나무들과 달리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 나무로 그 유용함을 알린다. 곧 우리는 ‘안식과 즐거움을 누림’으로 이와 같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말씀을 성취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요즘은 이와 같이 아가서에 빠져 그 내용을 음미하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사람에게 치이고 또는 어떤 이의 아픔으로 내가 몸서리치다 주의 은혜 아래 안도한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10).” 그러므로 우린 우리의 지난날이 어떠하였든지 주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아 2:4).” 그것은 오늘 우리가 누려도 되는 사랑의 쟁취다.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비록 기죽고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를 터인데, 주의 사랑으로 나는 우쭐하여 승리자로 주 앞에 세워진다.
오늘 바울의 모습에서도 병적인(?) 주께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지만 우린 저마다 그럴 처지가 아님에도 감사가 또 사랑의 고백이 나온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아 2:5-6).”
단지 오늘의 필요와 그 수고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게 아니라, 주를 간절히 사랑함으로 사랑해서 생기는 상사병과 같이 마음은 더욱 간절하다. 그렇듯 병이 날 지경이어서 새로운 힘과 생기가 필요하다. 즉 주를 사모함으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시 119:131).
이 놀라운 간절함, 그와 같은 심정으로 이방인들 앞에서 고한다.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3-14).” 내 살아왔던 날들이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고생스러운 삶이었으니’ 누구는 이로써 완고하고, 누군 이로써 마음의 병을 지고 세상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바울은 저가 예수이심을 알았고, 그와 같던 자신을 용서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심을 붙들었다.
아,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아 2:6).” 이를 8장에 가서도 “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아 8:3).” 곧 사랑의 애무다. 주의 손길이 오늘 우리의 상한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감싸 안으신다. 힘 없는 다리에 새 힘을 더하시고 나를 붙들어 다시 천성을 향해 걸어가게 하신다. 그러하니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7).” 즉 나의 사랑을 동요하거나 놀라 깨지 않도록 주의하라!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 2:8-9).”
우린 주의 사랑을 사모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가 나와 함께 하심을 알고 감탄과 찬송을 한다. 주를 사랑하는 자는 상사병에 걸린 것고 같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고백이 부끄럽지 않다. 그때에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산과 작은 산, 곧 우리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 주께로 나아가는 데 힘에 겨운 사실들 앞에서, 그러할지라도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4-5).”
우린 살아서 사는 동안에, 우리로 오늘 걸려 넘어뜨리는 것들,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에, “이르기를 이스라엘 산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께서 산과 언덕과 시내와 골짜기를 향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니 너희 제단들이 황폐하고 분향제단들이 깨뜨려질 것이며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너희 우상 앞에 엎드러지게 할 것이라(겔 6:3-4).” 그 무엇도 우리 가는 길을 중단시킬 수 없다.
때론 넘어지고 그래서 지체하고 낙심할 때는 있다 해도, 능히 극복하게 하시는 이의 권능으로, 그리스도는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 2:9).” 곧 저는 강인하고, 다정하시며, 사랑스럽다. 우리 앞의 그 어떤 장애의 벽도 넘어오신다. 주의 사랑으로 끝내 우리를 돌이켜 회개하게 하심으로 인도하신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나는 오늘 말씀을 읽으며, 어제 본문으로 묵상하였던 아가서의 한 대목을 연관지어, 누구의 아픔과 그 상한 심령을 마음에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너무 이른 시각에 잠에서 깨어 교회로 나오고,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이 어려웠던 것을 말씀에서 말씀으로 위하심을 얻는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어찌 그리하게 하시는지 알겠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엡 6:18).” 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6).”
주께 아뢰는 이 시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주께 새 힘을 얻고, 우리가 다시 힘을 내어 주의 복음을 알리는 것은,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고후 4:3).” 하여,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138:1, 3).
이를 알기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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