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행 24:15-16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 4
주는 홀로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우리의 생각과 그 준비를 무색하게 하신다. 앞서 걱정하였던 마음을 면구스럽게 하신다. 모든 일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으로 답하시며, 모든 것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보게 한다. 곧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친구 내외가 모녀와 같이 서둘러 이른 시간에 왔다. 앞서 여러 사정과 처지를 고려하여, 혼자 염려하고 있었던 마음이 어색하여졌다. 하나님은 앞서 일하시었고 친구 내외는 앞서 주의 뜻을 이루어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주말 오전 일찍 손수 차를 몰고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인천까지 온 친구의 수고가 기이하다. 그렇게 같이 시간을 하고 이어 같이들 소래포구로 해서 오이도로 다녀가는 길도 피곤하고 성가신 일이었을 텐데….
오늘 바울은 기꺼이 법정에 서서 자신을 변론한다. 그리고 당당히 밝히기를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 24:15-16).” 하고 존중과 인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를 향한 악함의 공격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이제 종교적인 탄압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해도 내적 갈등과 환경의 요인은 쉴 새 없이 변모하여 공격한다. 당시 표면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선동하여 바울을 공격했다. 오늘은 우리의 일상이 우릴 공격한다.
언제까지나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동안 숙명과 같다. 이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그렇듯 밀려왔다 쓸려가기를 반복한다.
나의 우려와 달리 스스로의 병명과 그 상태를 인정하였다. 아이가 같이 있어서 나는 눈치를 살피는데도 서로들 거침이 없는 걸 보니 평소 이를 인정하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다른 하나는 아이엄마가 자신도 글쓰기를 하면 안 되는가? 하고 물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아이도 쓰게 하겠다는 이유였지만 나는 그 자체로 반은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이를 어찌할까? 하고 능동적인 태도를 가진 것이다. 조현병과 일반 사이는 약물로 다스릴 수 있다.
평소 우울감은 두 종류와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저 졸리고 늘어지는 것인데, 이는 의지의 문제로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켰던 바울과 같이 이겨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어쩔 수 없는 불안과 공포, 그로 인한 몸의 반응이나 감정의 변화는 약물이 필요하다. 이는 평소 내과나 외과적인 치료에 따른 약물복용과 다르지 않다. ‘정신과 약’이라 해서 거부감을 가질 게 아니다. 의지적인 문제는 주께 간구하며 믿음으로 자신을 이겨야 한다. 우리의 본질은 그 땅의 흙이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와 같은 속성은 오늘도 여전하다. 그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고로 주의 영이 나를 압도하셔야 한다(창 1:2).
아이의 지적장애나 특별반 학교로의 전학은 반대하였다. 사회 속에서 일상을 살며 그 가운데 주의 뜻을 찾고자 하는 게 옳다. 낯가림이나 외면은 그 나이 때 가지는 여자아이들의 공통점으로 문제될 게 없다. 정신연령의 문제는 인정해야 한다. 낫고자 하게 하려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아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의 영은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 그것이 일반적인 것과 다르다고 해서 문제라고 한다면, 오히려 일반적인데 이것이 드러나지 않는 채 감정기복이 심하거나 더 깊숙이 가라앉히려 하는 경우가 더 큰일이다.
자신을 인정하고, 그 원인을 찾아 주 앞에 내어놓는 일. 그러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본인의 의지가 있어서 나는 놀라웠다. 주가 하신다는 것,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1, 4).
주는 선하시다. 그의 인자하심은 내 평생에 따르리니, 나는 어제도 주가 홀로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신학까지 한 이였다. 주의 일에 참여하였고, 헌신과 봉사로 앞장섰었다. 어디서 길을 잃은 것일까? 스스로 말하길 피해망상으로 수백 통의 고소장을 남발하고 그것으로도 억울함을 풀지 못한 울분이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에 나는 이르길,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나는 이 말씀을 내 삶으로 확인한다. 저의 남은 생애에서도 그리하실 것을 믿는다. 누구나 노여움이 그 속에 있다. 믿는 자는 그것으로 주를 찬송한다. 그 남은 노여움은 주가 허락하지 않으신다. 어제는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같이들 주의 뜻을 알고자 하였다. 친구는 곁에서 가만히 경청하며 집중하였다. 아이는 지루해하였으나 그게 당연하였다. 나는 저들에게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말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주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오늘의 실정은 정의하면,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0-11).” 어쩌다 우린 그처럼 먼 길을 돌게 된 것일까? 돌아오고 나서야 안다. 돌아오기 전까지는 별 수 없다. 저마다의 ‘광야 40년’은 지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품에 안은 것 같이 보호하셨다.
모세가 토로할 때에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하고 항변하였다(민 11:12). 그러다 우린 비로소 안다.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버지의 죄악을 그 후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렘 32:18).”
살아오면서 알았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 우리 안이 발람이 여전히 주의 뜻을 왜곡하려 든다. 그러다 말 못하는 나귀에게 욕을 들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2:22).”
어제 우리의 만남 이후 주가 어찌 다루시며 인도하시려는지, 나는 서로가 헤어지기 전에 주께 기도하며 이를 기대하였다. 의외의 모습과 우려했던 마음과 달리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내어보이심을 알았다. 그때에 주가 말을 내 입에 넣어주심으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잠 25:11, 전 12:10).” 이로써 주가 행하심을 나는 느꼈고 적극적인 저이의 말에 나는 보았다.
그때에 나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다만 그곳에 있을 뿐 주가 행하시는 현장의 증인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의 할 것은,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8).”
서로 거리가 멀고 자주 올 수는 없지만 우선은 글방카페에 글을 올리고 나는 이를 읽고 다듬으며 주가 이루어 가시는 방향을 살피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저절로 따라올 것이라 믿는다. 오늘 바울은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하는 몹쓸 소리까지 들었다. 이어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5).” 하는 저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굴하지 않았고,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14-15).”
곧 우리가 주를 인정하는데서 스스로의 죄를 인정한다. 자신을 인정할 때,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16).” 우린 할 수 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이에 따라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마음을 감찰하시고 정직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대상 29:17).”
그런 점에서 나는 친구의 자원하는 마음이 귀하였고, 서로가 합력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감사하였다. 이때에 우리의 등불은 말씀으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나는 친구 내외가 성경공부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그 시점에서부터 놀라운 변화가 따르고 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19:105).
이에 나는 더욱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어디서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찾기까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이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48).”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우리의 시간은 그리하여 서로 사랑함이었고, 주의 사랑이 함께 하심이었으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무엇보다 나는 이를 위해 기도하며,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5-7).
우리의 일상에서 주가 나타내심이었으니,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6, 21).
그리하여,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5-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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