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전봉석 2024. 2. 28. 05:42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25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시 139:17-18

 

 

저마다 자기 판단으로 고생이 많다. 그럼에도 뭐라 할 때 그 말을 듣기 힘들어한다. 결국은 당하고 상한 후에야 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가 의연한 것은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우리로서는 말씀이 있고 이를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있다.

 

어떤 일을 마주하고 주의 뜻을 살피는 데 있어, 하나님의 더 큰 뜻으로 응답하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의 섣부른 생각과 판단으로는 주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모든 일이 주가 행하시라는 것이라, 믿음으로 구함으로 행할 따름이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만 허용하신다. 또한 그 일이 주어지기 전에 앞서 행하였던 이들의 수고와 애씀이 있어 나는 다만 장단만 맞추는 격이다. 어떤 이의 이런저런 사연으로 앞서 생각이 많아 힘에 부치는가 하였더니, 이미 몇 해 전부터 그 일을 홀로 담당하며 행하였던 이가 있었다. 우격다짐으로 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저의 수고로 오늘 내가 맡은 이 일은 무난한 것이다.

 

곧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우리가 말씀에 거한다는 것은 주신 바, 일련의 상황에서 주만 바라게 하시는 힘이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그러할 때 우리로 그 일을 맡아 담당하게 하심은 주의 뜻을 알고 이에 따라 구할 수 있는 능력을 더하심으로 가능하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주와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두고 우리가 주의 뜻을 따라 합심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요즘 나는 본의 아니게 조현을 비롯하여 여러 형태의 감정적 병증을 살피고 이를 새삼 이해하게 된다. 어떤 이는 조증으로 늘 그 말투나 생각이 흥분상태 같다. 흥과 함께 분도 있어서 좋았다가도 화가 일면 걷잡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울증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바닥을 기듯 살거나 쓸데없는 망상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인데 그것을 실재한다고 믿는 게 문제다. 억울하고 분한 것도 혹은 공연히 감사에 겨워 사랑이 넘치는 일도 모두가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누구 일로 어떤 이의 도움을 받을까 하다 저의 앞서는 말과 생각으로 나는 하려던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저의 앞서는 활달함이 오늘의 일을 수월하게 닦아놓은 셈이다. 무엇을 같이 할까 하다 저는 저대로 하던 일을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입을 다문 것이다. 저마다 우린 모두 나약한 감정과 연약한 의지를 가지고 마치 뭐라도 다 할 줄 아는 아이 같이 산다. 정작 우리가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죄인임을 인정할 때이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보면 스스로 죄인이고 연약한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강하다. 자신의 정신적인 질환을 인정하는 사람이 어찌할꼬? 하고 받아들인다.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완고하다. 자기 생각만 늘 앞서서 옳다보니 상대를 배려한다 하나 그 속셈이 얕다.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신기하지? 우린 저마다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안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굴한다. 그러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 위에 굴림 한다. 대체로 자녀와 그 처에게, 혹은 친정 부모나 곁의 만만한 사람에게 표독스러워진다. 사랑이 지나쳐 애착이 아닌 집착으로, 병적인 관심이 서로를 망친다. 그럼에도 저가 어찌 여기까지 왔나 했더니 조용히 말없이 희생하는 성도의 기도와 도움이 있었다. 저는 다만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 6:2-3).”

 

할 때 저의 수고는 은연중에 안 믿는 자에게도 감동이 된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이를 어찌할까 하고 그 일을 살피니 앞서 충성하는 자가 있었고, 저는 오히려 자신이 한 일이 없다며 주께서 하신 일임을 내세웠다. 어떤 이의 이와 같은 말에 그야 말로 나는 남이 다 한 일에 얹혀있음을 인정한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주의할 일은 자칫 상대로 하여금 나를 너무 의존하지 않도록, 다소 무심한 듯 거리를 두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하나는 그와 같은 감정이 전이되면 자칫 예상치 못한 일로 더 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주의해야 할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이는 직접적으로 그 사람에게도 또한 그 일을 함께 하는 곁의 동역자들에게도 모두 해당한다. 너무 가까이도 그렇다고 너무 멀찍이도 아닌, 이를 위해서도 주가 늘 항상 우리 사이에 거하셔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특히 나의 고질적인 과잉감정이입은 스스로 다투어 이겨야 할 문제다. 늘 주께 내어놓고 이를 인정한다. 그것으로 주께 구하나 또한 앞서 염려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 서로가 주를 바라야 하는 일인데, “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나는 의식적으로 주를 앞세운다.

 

말씀으로의 권유다. 일상적인 소소한 이야기 가운데서도 나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자주 거론한다. 서로의 경계선상에 주를 모심으로 행여 감정이입이 그 도를 넘을까 하여, 서로 사랑하되 말씀으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단지 서로의 넋두리나 늘어놓는 대화는 자칫 부메랑이 되어 화로 돌아올 수 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6-27).”

 

이는 주께서 그리 행하고 계셨다. 그리하여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가령 누구 일로 어떤 이에게 물어 그의 도움을 구하려다 저는 이미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는 데서 새로웠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수월하고 이익이 되는 사람이야 누군들 싫다할까? 그런데 늘 손이 가고 일이 번거로운 상대를 대하는 데 있어 스스로가 나서는 일이어서 그게 참 귀하였다.

 

또한 누구의 어떤 사연을 두고 이를 마음에 두어 기도하는 일은 우선이다. 할 때 주가 그 일을 같이 나누어 기도의 짐을 덜어주시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한다는 일, 어떤 일에 맞설 때 주가 주시는 지혜로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 22:3).”

 

섣불리 나설 일이 아니란 생각을 주실 때 멈춰야 한다. 순간 주춤하면서 뒤로 물러서야 할 때를 주가 알게 하신다. 또는 상대적으로 압도하여 저의 고집을 꺾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주의 권능으로 강권하심이 따른다. 우리의 그 어떤 안전의식도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지는 못한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주장과 노련한 경험이 결국은 화를 자초하는 내용이다. 이를 보면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 4:8).

 

나의 수고나 어떤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은연중에 우린 얼마나 자주 사람에게 떠벌이고 어떤 일에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고는 하는지! 그리하여 저가 내 편이 될 줄 알지만 후에 보면 그렇게 한 말이 오히려 자신의 발목을 잡는 올무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주를 의지하고 가는 길이란 나의 감정까지도 내려놓고 따르는 길이다. 어떤 서러움이 혹은 조급함이 어찌 우릴 걸려 넘어지게 하지 하려 하지 않겠나? 그러나 인생의 거친 풍랑이 있어 우리가 더욱 우리의 본향을 사모하는 것이고, 그 바람에 밀려 더욱 빨리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여기서 주가 바라시는 것은 충성이고, 충성은 성실함으로 답이 된다. 어떤 이의 무슨 일에 외면하지 않으며 저의 상처를 같이 아파하면서 내 것이 치유가 된다. 우린 모두 상처 입은 위로자로 서로 곁에 서있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이 일이 쉬운 듯 하나 그게 또 그렇게 안 된다. 범사에 주를 인정한다는 것, ‘에이 설마’ 하는 마음에 밀려 늘 자기 생각에 우선하게 하는 우리의 고질적인 죄의 속성을 인정하면서….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 9:23).”

 

행여 내 안의 어떤 만족함이 나로 걸려 넘어지게 한다. 분별력이 결여되면 결실은 없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잠 22:3).” 하여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하려다 저의 말에서 아차, 하고 말을 멈추기도 한다. 무슨 말을 하려다 순간 듣기만 할 때도 있다. 그때의 내 생각이나 감정은 뒤로 물려두고 전적으로 주의 뜻만을 구한다. 어떤 이와 통화하며 연신 주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는 경우는 그래서이다.

 

말은 해야 할 때보다 안 해야 할 때가 더 많다. 그게 힘들다고 섣불리 말하면 그 말이 내 등에 와 꽂힌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7-18).” 사람은 모두 달라서 그때마다 주가 주시는 분별력이 없으면 휘둘리기 일쑤다. 저마다의 생각이나 그 성품이 다 달라서, 옳은 말이라 해도 안 하니만 못한 경우가 더 많다. 듣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때가 말이다.

 

다만 주를 믿음으로, 주께 의지하며…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49:6-8).

 

그렇다면 누가 무슨 값으로 그 영혼을 살까? 어림도 없는 것을 그처럼 기를 쓰고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하는 사람 앞에서는 묵묵부답일 뿐이다. 결국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잠 28:26).” 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미 6:1-2).”

 

주가 행하신다. 나는 다만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이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139:1-5).

 

하시면,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7).

 

이에,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17-18).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