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9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 7:17
우리의 연약함으로 우리가 주를 바랄 터인데, 우리의 아집이 또한 교만이 우리로 같은 어려움을 지속시킨다. 결국은 아이마저 와해된 행동, 와해된 언어로 정서적둔마 증세를 보이고 있다. 우울증은 심화되었고 조현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엄마는 그 일로 우울해하면서 실은 그럴 줄 알았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망상과 환청, 환각을 동반하는 세계로 양극성인격을 가지고 있다. 아이엄마와 통화를 하고 저를 곁에서 돕는 이의 설명을 더해 들었다. 아이와 대화를 시도하고 친구에게 우려를 표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은 본인들의 완강한 거절이다.
나는 사모에게 다음 주 목사와 통화를 하고 매주 한 번씩 만나길 원한다고 전했다. 아이를 맡은 이상 저들의 문제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본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한 아이의 일은 곧이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전하는데 사모는 난색을 표했다. 하필 또 부부가 싸웠다고 하면서, 이 모든 이들의 공통점은 회피와 변명이다. 늘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가 자신들을 억울하게 한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하는 오늘 말씀 앞에서 나는 눈물이 핑 돈다. 어제 오후 서너 시간을 전화로 시달리다,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나까지 우울해졌다. 우린 자꾸 뭔가를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말의 지혜’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바울은 일갈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
그러니 다들 한 눈 팔듯 다른 데를 바라보려 하는데, 정작 자신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는 못한다. 아이엄마는 아이 일로 걱정이 태산이다. 나는 그런 저에게 당신이 주를 영접하고, 주와 함께 씨름하면 된다고 이른다. 그 말이 서운한지, 엄만데 뭐라도 해야 한다고 역성이다. 그러니 뭘 하고 있었나? 더는 아이를 이기지도 못한다. 사모는 아이의 의견을 존중한답시고 아이에게 물어보겠다고 한다. 나는 저런 소릴 들으면 화가 난다. 성경을 모르면 모를까,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잠 20:11).”
그러므로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으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잠 19:25).” 별 수 없다. 광야 40년을 돌든가, 불뱀에 물리든가, 땅이 꺼져 삽시간에 삼킴을 당하든가… 뭔가 인생이 더는 손 쓸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별 수 없다. 사지육신 멀쩡한데 왜 늘어져서 잠만 자고 우울하다고 하는지, 그것이 병적이라면 약을 먹고 인정하는 의지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이의 일로 한숨을 쉬는 저에게 차마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별 수 없다. 갈 데까지 가야 하는 수밖에. 특히 나는 사모와 목사 내외를 보면 자꾸 속상하고 화가 난다. 하나님께 피하고 그 수치를 면할 의지가 없다. 믿기는 하는 것인지….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 하는 악순환의 역속인 것 같다(느 9:27-28).
그럼 이제라도 주를 바라며 다시금 주 앞에 고하고 주를 바라야 하는데, 큰돈을 들여 별의 별 치료는 다 받으면서 왜 주 앞에 돌이켜 회개하라 하면 이를 우습게 듣는 것일까?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29).” 그러니 이 일을 어쩐다? 우선 진단이 그렇게 났으나 약을 먹고 착실하게 이를 인정하면 좋아질 수 있다는 결과에도 아이나 아이엄마나 도로 그 자리에 가서 누워 서로를 탓한다.
아,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7).” 나는 아무리 권하여도 소용이 없다. 다음 주에 통화라도 하겠다는데 서로 싸운 이야기로 방어를 하면 어쩌겠다는 것인지. 아이를 보내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보면 최소한 서로 분리만 돼도 반은 해결이 된다. 그런 와중에 서로 이혼한 사이에 아이가 미성년자라 병원비지원이 가능한데도 이혼한 전남편측에서 이를 동의하지 않아 고스란히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서로가 어떤 이유로 갈라졌는지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결국 자신들이 자신들 발등을 찍는 격이다. 전에는 이혼을 죽어도 안 해주겠다던 것이 문제가 됐고, 그런 와중에도 1억을 요구하고 어디 건물을 달라고 한다니까… 이혼은 자신들은 물론 전 가족을 다 피폐하게 한다. 아이의 상태나 자신들 상태를 도대체 판단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자기주장을 우선하다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내가 울화가 치민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고스란히 아이들만 고생이다. 그러니 저들을 어쩌면 좋을까?
동생일로도 마음이 어려운데,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어떤 어려움은 우리로 주의 길을 바로 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마음이 어렵고 복잡한 하루였다. 내가 주를 바람은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눅 1:74-75).” 주의 살아계심은 우리의 실상이 된다. 우리로 감당하게 하신 이가 우리로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더하실 것이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런 일을 앞에 두고 나를 돌아본다. 주의 뜻을 살핀다. 이 일로 서로가 연결된 사람이 여럿이다. 당사자들을 비롯하여 곁에서 함께 기도하자고 의기투합하는 이가 늘었다. 문제는 아이인데, 아이 일은 어른들의 일이고, 그 일이란 게 고스란히 서로의 갈등으로 심화되어 빚어진 일이라, 백 날 화해를 구해도 자기 몫을 우선하는 부모들에게 치를 떤다. 아이가 그 지경인데도, 그런 일이 사실인지 과장인지 어이가 없다. 저마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을 놓지 않는다. 그러니 어쩐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갈 데까지 가자, 우울한 영혼들이여!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서로의 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게 지혜였다. 말로 전달하고 설득해야 하는 입장에서 나는 나의 말에 힘이 없다는 것을 주 앞에 고한다. 그러니 내가 무슨 엉뚱한 도술이 있는 게 아니라면, 같이 아파하고 기도하는 동안 저에게 바라다 내가 주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낙심하지 않을 것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주가 이루신다는 사실, 나의 구함은 엉뚱하였어도 그것으로 나의 그릇됨을 밝히게 되는 바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그래서 나는 ‘사모’에게도 ‘아이엄마’에게도 또 누가 아이를 보냈으면 할 때에도 ‘당신들이 필요하다’고 밝힌다. 먼저 자신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한 아이들의 문제는 해결책이 없다. 여전히 자리에 누우면서 또한 대책이 없다고만 하니,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우리 죄의 속성이란 게 그처럼 무섭다.
실제 나는 왜 점점 사람들이 큰 교회로 찾아들고, 저마다 개나 고양이 등 동물들에 환장하며 사랑하는지, 게임이나 캐릭터 등에 환장하는지 잘 안다. 우리는 더 이상 인격적인 사랑이 붕괴되었다. 와해된 언어는 서로의 사랑이 전달되지 않는다. 자기 안에 갇힌 언어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망상의 늪은 깊고 넓어서 허우적거리며 손에 잡히는대로 서로를 끌고 들어간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이와 같은 부부 사이는 환상이 되었다. 비인격적인 관계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게 함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와해된 사랑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한다.
우리의 진정한 관계는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교회가 그럼 이 일을 바르게 수행하고 있나? 서로가 이를 피해 큰 교회로 수평이동하고 작은 교회는 점점 고갈되어 성도가 없다. 그러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하시는 말씀 앞에서 나는 우울하다. 우리가 진정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는 것일까?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2-14).”
내가 받은 그 은혜가 귀하여 한 영혼, 내 곁에 두시는 이로 나로 주를 바라는 것으로 주의 뜻을 이룬다. 당장은 사모와 그 내외 일로, 저들이 주의 사역자로 바로 서기를 위해 기도한다. 또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6-27).” 이를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하신 이가 오늘 이 모든 상황을 열거하신 일이다.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후 8:16).” 이로써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3).”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4-7).”
부디 일련의 이 모든 상황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나타내기를, 나는 아이 엄마에게 본인이 바뀌면 된다고 거듭 말하였다. 아이 일은 아이와 아이의 하나님께 맡겨두고 본인은 주 앞에 바로 서서 주와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를. 나는 저를 이해하기를 접고,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9).” 하시는 주의 뜻을 따라 주가 만나자고 하시는 일에 집중한다.
결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갈 4:19-20).” 부디 주의 권능으로 나로 또한 강하게 하시기를.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이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7-29).”
잘난 줄 아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비애여!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31).”
하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시 7:1).
나로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0).
오직 주를 바라게 하시려고, 나로 먼저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11, 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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