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전봉석 2024. 3. 18. 05:01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2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4

 

 

스스로 낫다고 여기는 한 별 수 없다. 우리 사람이 여느 피조물보다 나은 게 무엇일까? 하나님이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심으로 또한 우리 안에 그의 영이 거하심으로였다. 우리는 모두 경계인이다. 경계와 비경계 사이에서,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서, ‘69와 89’ 사이에서 살아간다. 69 아래를 지적장애로 보고 89 이상을 정상으로 보는데, 나는 정상을 정상이라 고집할 때 비정상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곧 우리의 삶은 영적세계의 일과 무관하지 않다.

 

마치 계통방생과 같이 이는 이어지고 이어져서 에덴 이래로 모든 인류는 죄의 굴레 가운데서 살고 있다. 가령 누구는 그의 친정에 가까운 이 둘이 자살을 하였고 몇몇이 우울을 겪고 있는데 자신 또한 우울인 것을 알면서도 소홀히 여긴다. 아이를 대할 때 이를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벌써 그 조짐이 보인다. 이상하게 서로가 끌리듯 혹은 도피처로 삼아 결혼한 터라, 오늘의 현상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자해나 자살 충동은 유전적인 이유가 많다. 그런데 또 보면 그 가정이 대체로 공통적으로 ‘어떤 문제’로 서로를 저격한 셈이다.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하다, 누가 같이 온다는 문자를 보고 운전하고 오면서 내내 주의 뜻을 생각하였다. 내가 어찌 주의 뜻을 알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운전을 하고 왔는데 오늘 말씀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하심이어서 한참을 머물다 하는 소리다. 그러니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 나로 오늘의 이 일을 감당하게 하심은 그리 두신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아는 데 있어,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 나는 성령을 구한다. 주가 주시는 마음을 바란다. 어떤 아이의 일로 누가 묻거나 어떤 것을 구할 때 나는 그 부모를 소환한다. 대체로 이를 문제로 알고 찾은 한 사람이 전부이기는 하나, 부모의 막힌 영혼이 아이에게 전가되어 그의 총구가 겨누어져 있었다. 저들은 나름 이유가 있으나 실상은 저격당한 아이가 그 부모를 일깨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11).”

 

나는 오늘 말씀에서 이 부분으로 집약하여 초점을 맞추게 된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수단으로 전할 수 없다. 오늘에 두신 일련의 일들을 사람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주를 인정할 때 주의 영은 활동하신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 127:1).

 

마치 우리가 나서서 할 수 있다고 하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가는 게 인생이다. 여기서 정상과 비정상은 무의미하다. 서로가 보편적인 경계를 긋고 그와 같은 경계 선상에 있을 때 스스로를 정상이라 하는데, 글쎄… 스스로 이를 인정하는지? 순간 욱, 하여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때 스스로 당황스러워한 적은 없는지? 기껏 좋은 사이로 지내오고 같이 갔으면 하다 일순간 자신의 이기와 허점으로 상대를 저격하는 마음을 어찌 정상으로 생각하는지? 점점 우린 비인격적인 것들과 관계하기를 더 좋아한다. 상대적으로 인격적인 관계로 지내는 일을 어려워하고 꺼려한다. 그러다보니 교회도 ‘친절한 타인’ 뿐 한 지체로 한 몸을 이뤄간다는 게 점점 더 묘연하다. 현실적으로 대형교회가 점점 더 대형화되는 이유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예수 없는 예수교가 늘고 십자가 없는 교인의 삶이 는다. 분명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를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하고 받았다. 흔히 팔자소관을 자기 십자로 여기는 사람은 주께 맡기지 못한다. 자신이 어찌 하려다 아이가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자신이 알아서 할 모양이다.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아이 일로 본인이 ‘잃어버린 사랑’을 찾기를 바란다. 아이를 주께 맡기려면 자신이 주를 신뢰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이와 같은 삶은 ‘사울’을 벗어던졌을 때에야 ‘바울’로 살 수 있었다. 어떤 이는 내가 저의 신앙을 운운하려 하자 아이나 맡아달라는 식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 뒤 오늘에 이르러는 자신의 믿음을 신뢰할 뿐 교회를 나가지 않고도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교회 안의 성도들과 한 몸을 이루지 못하면서도 스스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한다. 늘 말하지만 자신의 신념이 믿음이라 여길 때 가인도 최선의 제사를 드렸고 그 결과로 동생을 죽였다. 자신들 좋을 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서 아이가 저격당하는 것도 몰랐다.

 

서로가 툭툭, 던지는 막말이 아이의 심장을 관통하고 그 영혼을 병들게 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표면적으로도 열에 아홉은 이혼 가정이거나 부부싸움이 잦은 관계에서 자녀의 문제는 발병한다. 어떤 애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산만하고, 어떤 애는 지능이 자라지 못한다. 어떤 애는 돌연 다른 세계를 떠도는 별이 된다. 망상과 상상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딤후 2:10).”

 

나는 내게 오는 자들에게 주를 인정하는 것으로 우선하기로 했다. 안 믿는 이의 아이까지 내가 어찌할 능력도 안 되지만 그 결과 또한 헛수고였다. 가령 자해를 하여 사랑 받기를 원하는 아이의 경우 아이엄마에게 예수 믿기를 권하였으나 저의 대답은 늘 자신도 믿는다는 거였다. 교회를 안 갈 뿐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믿고 사랑한다고 하였다. 그러다 아이가 오고 마음을 열기 시작할 무렵 같이 예배를 드리기를 원할 때 그 엄마가 신경질적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설령 교회를 보낸다 해도 ‘이런 교회’는 싫다고 하면서 어디 대형교회를 지목하고 갔다.

 

그때는 참 많이 슬프고 우울했는데, 그 일로 알았다. 저들의 하나님과 내가 아는 하나님이 다르구나! 내가 믿는 하나님과 많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 다르구나! 결국은 단물만 빨려드는 벌들 같이 예수의 남은 고난을 짊어질 마음은 없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11).”

 

좋은 말만 원하고, 자기 말만 들어달라는 것은 전형적인 죄의 단면이다. 어떤 일을 두고 자기는 늘 옳고, 억울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여기는 한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이젠 이상할 것도 없는 게 저들 가운데 대부분이 예전에 주를 알았다. 믿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교회를 다녔었다. 저들의 완고함은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 12:43-45).”

 

영락없다. 내게 오는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 또한 믿는 자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게 뭔 소린지는 모르겠으나 교회는 안 다녀도, 말씀을 받지 않으면서도 믿는다고 하니 대체 뭘 믿는다는 것인지. 단언하건대 보편적인 선이나 보편적인 신이 나의 하나님이 아니다. 저들의 하나님은 온갖 잡신으로 자신들이 섞어버린 혼합종교의 하나다. 가까웠던 선생의 하나님이 그러했고, 가까웠던 친구의 하나님이 그러하다. 저들은 자유롭게(?) 부처나 알라나 그 외의 모든 샤머니즘의 대상 또한 한 하나님이다. 하여 나는 이제 저들이 믿는다는 소릴 믿지 않는다. 내가 가진 믿음과 다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오늘 본문에서도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를 명확히 하고 시작하는 이유를 알았다. 사람들은 모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기를 원한다(1). 그저 듣기 좋은 말로 자시 말에 귀를 기울여주길 바라면서 자신들은 듣지 않는다. 그럴 때 나 역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 그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정말이지 확실히 똑같은 것은 누구도 듣지 않는다. 권함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하여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

 

그러하기를. 오늘 같이 온다는 어떤 이에 대해서도 내가 알기는 저 역시 믿었던 이 같고, 누구보다 자기애가 강하다. 어떤 아이의 모친처럼 이혼 후 저는 더욱 강인하였다가 지금은 아주 심각한 우울증에 붙들려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다. 저 역시 믿었던 이였는데, 믿는다는 이에게 된통 당하면서 ‘이 몹쓸 병’에 걸렸다고 저는 억울해했다. 내가 주의 이름을 전하자 신경질적으로 저가 거절한 것도 그 때문이다. 굳이 믿는다면 자신은 불교가 맞는 것 같다면서 더 이상의 대화를 단절한 사례다. 누구처럼 ‘이런 교회’는 보내지 않겠다고 한 이도 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겪었던 일(?)로 큰 교회, 서로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는, 넉넉한 교회를 찾은 것이다.

 

모른다, 나도. 내가 뭘 안다고 ‘이런 이들’을 붙이시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하였던 것처럼 나는 다만 예수 이름으로다. 다른 걸 줄 게 없다. 그런 게 아니면 보다 전문가를 찾든지, 공신력 있는 병원을 찾든지, 나는 줄 것이 예수의 십자가뿐이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이러려고 나를 여기에 두신 것이라면 또한 이르시는 대로 나는 할 뿐이다. 말씀으로가 아니면, 기도로 서로 같이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나는 솔직히 하는 게 없다.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골 1:23).” 이와 같이 나도 또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누가 같이 온다고 할 때, 이제 겁나지 않는 것은 내게 있는 것이 ‘주의 이름으로’ 뿐이니,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을 그가 아시나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4-15).” 그러니까 누가 받아들이거나 이를 거절하거나 나는 이제 개의치 않는다. 다만,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

 

오늘 말씀에 답이 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8:1).

 

이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4, 6, 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