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전봉석 2024. 3. 22. 05:00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 6:17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시 12:7

 

 

세상 일에 휩쓸리지 않을 수는 없다. 몸을 입고 살면서 몸의 요구에 자유로울 수도 없다. 누가 어느덧 60이 되었다는 데서 갑자기 지나온 삶이 우울해졌다. 감정은 조용한 파동처럼 너울이었던 것이 순식간에 풍랑이 된 것 같다. 며칠째 감정이 가라앉는다, 하고 저는 호소하였다. 그럴 수 있으나 그래도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린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오늘 말씀은 명쾌하다. 곧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17).” 우린 더 이상 세속적인 일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리할 수 없으나 그리할 수 있다. 우리로 세상이 화평할 수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믿는 자의 존재는 그 시대 그의 속한 곳에서 영향을 끼친다. 저로 인하여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어떤 일에서도 자유하다. 즉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잠 12:20).” 그러므로 우리는 주신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시 34:12-14).

 

나이 아흔의 장모는 어금니를 뽑는 데 있어 복용하는 약 때문에 위험할 수 있어 대학병원으로 갔다. 며칠 전부터 두려움에 사로잡혀 행여 죽을까 하여 바라는 기도가 길어졌다. 우리에게 더하신 날 동안에 주신 한 날의 삶으로 충만할 때 흔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이제 예순, 조만간 퇴직도 해야 하는데… 하면서 누가 우울해하는 것을 두고 나는 뭐라 나무랄 수는 없었다. 다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나는 이 말씀을 사랑하면서 더는 그런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 살아도 주의 것, 죽어도 주의 것이라면 내가 더 이상 염려할 것이 없다. 성공도 실패도, 즐거움도 낙심도 한낱 지나가는 것이어서 나는 이미 영적인 존재였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이와 같은 의연함이 현실일 수 있다.

 

우리로 그리 살게 하심인데,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3-14).” 이 사랑은 주가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가능하였다. 하물며 세상 송사에 휘말려 그 판단을 세상이 하게 해야 하는 현실이 더러는 억울하나 더러는 복이 된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세상에 속한 자들은 원래 우리를 공격하게 돼 있다. 서로 잘 지내는 것 같다가 돌연 그의 공격적인 마음은 자연스럽다. 오히려 우리는 주의하는 것이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세상은 요지경인데 그런 것을 보며 우린 경계한다. 두려워하며 자신을 주의한다.

 

아이가 작은 소동이 있었다. 물론 일의 발단은 아이의 실수나 잘못일 수 있는데, 엄마의 평소 선입견과 이를 문제로 지적한 이의 평소의 편견과 뜬금없이 끼어들게 된 아이아빠의 훈육이 아이로서는 억울하였다. 더듬더듬 아이는 그때 상황을 말하였고 엄마에게는 서러움과 아빠에게는 무서움을 호소하였다. 이를 말로 하는 것과 글로 쓰는 것에 이처럼 큰 차이가 드러난다. 아이엄마는 이를 보고 놀랐다. 자신들의 오해와 편견이 아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되새겼다. 더욱이 아이아빠는 그렇듯 훈육을 하면서 반성문(?)을 세 번씩 다시 쓰게 하는 동안 자신은 하던 게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빠는 그때 게임을 하고 있었죠! 아이의 냉소적인 말이 서늘하였다.

 

나는 두려웠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 3:13-14).” 우린 너무 쉽게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부모 연습이 필요하다. 자격까지 운운할 수는 없지만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에서 자식만큼 어려운 상대가 또 있을까? 아이는 아직 어려 아빠의 강압적인 태도와 엄마의 어눌한 지적에 눌리고 주눅 들기 일쑤지만 그게 다 축적되어 감정의 어두운 면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아이아빠를 오게 하자. 우리가 서로 세운 기도 제목이다.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6-7).”

 

누군 어느새 나이가 들었다는 데서 갑자기 밀려드는 우울감을 호소하고 누구는 늘 변덕스러운 아이 일에 자신들의 태도를 뒤돌아보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지혜다.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1-13).”

 

이를 얻기 위해 우린 우리의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인정하고, 이를 주 앞에 아뢰며 주와 함께 함이 귀하다. 즉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말 2:10).” 더는 우리로 자유하지 못하게 할 것은 없는데도 남을 겨누는 총구는 여전히 조준사격이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8:11-12).”

 

우리는 알게 모르게 너무 많은 죄에 노출되어 산다. 그러면서도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분풀이하듯 함부로 하고 자신을 억압하거나 훈계하려는 데는 예민하게 방어적이다. 저들은 왜들 그러한가 했는데 일정부분 답이 풀렸다. 아이엄마가 무슨 말 끝에 시어머니가 돈으로 마흔 된 아들을 조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무슨 말에 저들이 듣지 않자 어머니는 아이통장에 든 돈을 내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곧이곧대로 들으면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거면 돈을 내놓고 더는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그럴 것이란 생각은 했으나 그처럼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여전히 저들 부모는 성장한 자식들 가정의 일에 관여하여 왔고 여의치 않을 때면 돈을 회수하거나 보태거나 하면서 사람을 길들여왔다. 그만한 규모의 생활이 수입에 비해 어찌 가능한가 짐작은 했지만 그렇듯 노골적인지는 몰랐다. 아이엄마가 이를 실토하면서 더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항변하면서도 다른 방법은 없었다. 도로 고개를 숙일밖에. 아, 이게 그러니까 친정이든 시댁이든 그 부모의 관여가 오늘에 저들 가정을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로 방치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아이라, 나는 다시 한 번 아이의 일에 대해서도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살전 4:6).”

 

부모라고 해서, 선생이라고 해서, 어른이랍시고 우린 너무 쉽게 폭력을 폭력 아닌 것으로 둔갑시켜 남의 인생에 참견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강도는 무뎌져서 심지어 그것을 사랑이라 여긴다. 더욱이 시댁은 일찍 부모의 별거로 인해 각각 저들은 오늘까지도 지원을 끊지 않는데, 그때마다 고질적으로 관여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켜왔다. 친정은 또한 무차별적인 연과 연으로 뒤엉겨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의존적으로 매달린다. 얼추 파악을 하고 보니 왜들 저 영혼들이 마비된 상태로 마치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 못하는 것일까?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문제는 서서히 이제 드러나는 몸의 증세다. 고혈압에 당뇨에 무기력증에 은둔형 외톨이로 거구가 되어가는 비대해진 몸을 이끌고 게임에 혹은 늘어져 자는 게으름과 나태에 자신을 방치하고 있었다. 어그러진 양가 부모의 사랑이 어그러진 가정을 만들었고, 저들 사이의 아이 또한 단순히 늦된 게 아니라 병적인 증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말이 어눌한 게 아니라 회피였다. 발음을 우그러뜨리고 자기 의사를 막무가내로 고집부리거나 금세 타협하거나… 그 모든 게 일시적인 ‘당근’으로 혹은 ‘채찍’으로 수동적이라는 게 문제였다. 일부러 어제 아이와 아이엄마를 동시에 앉혀두고 서로의 주장을 서로의 관점에서 풀어내게 했고, 그러는 동안 아이엄마는 자신이 어떤 실수와 잘못을 하고 있었는지를 별견했다.

 

사랑이 잔인한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절제 없는 사랑은 애착을 넘어서 집착이나 자기 분풀이가 되기도 한다. 서로의 인격적인 관계는 사라졌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게 악이 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도우심을 바라지 않는 모든 것이 악하다.

 

또 한 아이엄마는 퇴행을 하고 있다. 수동적으로 ‘주사’를 맞고 알약은 먹기 싫어한다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순간적인 충동으로 모든 결정이 적당하다. 머리 감기를 성가셔하며 미장원에서 샴푸를 한다. 그러는 값이 적당하여, 돈이 없다면서도 그 집도 보니 친정부모의 적당한 돈이 저를 망치고 있었다. 여든이 넘은 늙으신 부친 손에 이끌려 그나마 한 달에 한 번 주사를 맞는데, 지금도 자신은 주사를 왜 맞는지, 문제의식보다 주사 맞기 싫다, 알약 먹기 싫다는 이유로 자신의 병세를 가늠하지 못한다. 나는 저를 생각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도 안타깝다. 약을 드시라, 주사는 자신이 정신 차리고 맞으시라, 생활을 좀 더 규칙적으로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시라… 한두 번 얘기하다 더는 소용이 없다는 데서 막혔다.

 

다만 일련의 상황들을 보며 나는 주가 내게 저들을 붙이시는 이유를 생각한다. 동시다발적으로 너덧 가지의 상황이 동시에 진행되고, 직간접적으로 내가 개입하는 문제여서,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이 모든 게 영의 일인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 다 그래, 할 때 나는 교회 밖의 사람에 관하여는 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믿는 자의 일들인데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나약하고 제멋대로인지. 자기 좋은 하나님을 선호하며 자기 좋은 말씀으로 귀 기울이며 신앙이랍시고 믿노라, 하고 산다.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오늘 바울은 이를 심화하여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전 6:4).” 하물며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6).” 이 무슨 일인지, 믿는 자들이 서로에게 더하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8).” 그러니 안 믿는 자들로 무슨 덕이 될까?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11).” 우리가 지금 어떤 은혜로 살고 있는지? 그러므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12).”

 

우리의 잃어버린 자유함을 어찌할까?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14).” 다른 수는 없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5).” 부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17).” 하시는 이 놀라운 영적 의미를 우린 얼마나 귀히 여기고 있는지? 아,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시 12:7).

 

오늘도 오직 주를 바람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그러므로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12:1).

 

점점 나약해지다 소멸하는 것은 아닌지.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4).

 

너무 겁 없이 사는 세상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5).

 

말씀으로,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6).

 

그러므로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

(7-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