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전봉석 2024. 3. 23. 04:13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고전 7:22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 13:5

 

 

우린 다소 극단적이다. 이쪽이나 저쪽으로 치우쳐야 직성에 풀린다. 그러나 지혜는 일러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5-17).”

 

얼핏 들으면 이도저도 아닌 것처럼 회색지대를 권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나치게’이다. 스스로 너무 애쓰다 자신의 애씀으로 지쳐 그 열심으로 자신을 삼키는 수가 있다. 친구는 며칠째 우울한 목소리로 힘이 없었다. 어느새 문득 나이가 들어 자신의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남은 날을 생각하다 그러했고, 어제는 피로가 누적되어 몸이 기운이 없어 힘에 겨워하였다. 내가 할 소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금요예배를 쉬고 일찍 들어가 좀 쉬라고 하였다. 주말에 밀린 성경공부를 하고 숙제를 하느라 너무 애쓰지 말라고도 덧붙였다. 지혜는 마저 이르기를,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곧 우리의 애씀이 우리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피곤하게 하여 침체가 올까 염려되었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왜 하필 예수님이 너무 늦게 오셔서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으셨는가? 하고 묻기도 했다. 저의 질문은 노아 때에 이미 심판으로 한 번 갈아엎었으면 그때 예수님이 오셨더라면 좋았을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의 의문을 기특해하면서도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함이 안타까웠다. 구약 시대에는 이미 그때마다 선지자와 말씀이 있었다. 노아가 자기 의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인가? 저와 그 가족의 구원이 남보다 나은 게 있어 그들의 의로 멸망하지 않은 것인가?

 

당시 모든 사람이 너무 악하여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6-7).” 그때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

 

노아가 의로운 것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심과 같다. 그럼 저들이 홍수 이후에 앞선 이들보다 악에서 멀어졌는가? 그래서 함이 저주를 받았던가? 저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죄는 여전하다. 그 시대마다 주의 종을 세워 말씀으로 저들을 다스리셨다. 곧 예수님이 오신 것은 참고 또 참은 결과이다.

 

왜 하필 그때인가? 하고 물으면 나도 모른다. 그 때와 시기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다만 예수님은 앞서 구약에 일러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미리 예언하셨고, 예수의 오심은 앞서 그 말씀을 이루시는 결과로 완성이 되셨다. 우리 사람은 그 후로도 여전히 죄악은 가득하다. 그러나 구약과 다른 것은 ‘행위언약’에서 ‘은혜언약’으로 약속의 은혜가 완전하여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21).”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하심은 우리가 짊어지고 있던 죄의 굴레에서 놓여났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그런 가운데 어제 그와 같은 질문처럼 우린 여전히 ‘~하였더라면’ 하는 식의 자기 판단과 기준을 요구한다. 나사로가 죽고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린 하나님의 뜻, 그의 섭리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의지로 추정하고 납득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다 안다면, 성경의 말씀을 명쾌하게 논증하고 입증할 수 있다면 더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지 않으실까? 하다못해 우리 몸의 신비도 다 알지 못하고, 우리 뇌도 다 쓰지 못하고, 자연이니 우주니 하는 이 피조물의 세계도 다 알 수 없어 그저 신기해할 뿐이면서 하물며 하나님을 뜻을 다 알기 원하고, 안다 하면 그게 더 무식한 것 아니겠나?

 

나는 이런 부분에서는 더 이상 설명할 능력이 없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오히려 본능적으로는 그리 아는 것을 우리의 의지 곧 이성적으로는 알 수 없고 인정할 수 없어서 부정하기 일쑤인데, 스스로 다 안다고 하고 알기를 원하는 데서 자신의 교만은 하나님보다 앞선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하찮음, 그 나약함에 대해 논한다. 스스로의 성욕도 다스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어서 이를 억지로도 아니할 것이다. 성도라 해서 그 안에 음행이 없겠나? 그러느니 결혼하여 살라는 것이다. 이 일, 주를 위하여 독신으로 사는 일은 주가 그리 능력주시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를 억지로, 지나치게 하려니까 어느 신부가 수녀와 혹은 남자가 남자를. 어느 수녀가 신부와 혹은 여자가 여자를. 어느 목사가 여신도와 또는 남몰래 포르노에 심취하기도 하는 것이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우리는 성적 유혹에 노출되어 산다. 이에,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 18:22).”

 

이혼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에 스스로들 자기부정을 일삼는 꼴이기도 하다. 죽고 못 살 것처럼 사랑을 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감정은 식고 단점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인데… 나는 자주 언급하는 것이 ‘좋아한다’는 감정이 ‘사랑한다’는 감정으로 여겨지면서 이와 같은 현상을 심화된다. 좋아하는 것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마치 사물을 좋아하다 더 좋은 것으로 처음 것을 버릴 수 있고, 산을 좋아하다 바다를 좋아할 수 있듯이 사람에 대한 마음도 이 사람이 좋다가 어떤 계기로 저 사람이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천륜과 같아서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 가족이 남다른 인연으로 엮이는 것은 서로가 그만큼의 책임으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책임에는 좋고 싫고의 문제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결혼이 음행의 도피를 위한 게 아님을 오늘 말씀은 분명히 한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 7:2).” 하시지만 그 뒤에 따르는 의무에 대해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3).” 곧 이 관계는 권리가 아닌 의무의 관계이다. 그래서도 신중해야 하고 한 번 그리 맺어진 인연에 대하여 주가 맺으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10-11).”

 

그런데 어느 순간 아니 이미 에덴 이후로 암암리에 이혼은 물론 이중 삼중의 살림도 차리고, 우리나라만 해도 첩에 첩을 두고 사는 게 보편적이었다. 표면적으로 알 수 없어 그렇지 오늘도 이러저러한 관계로는 바퀴벌레 숫자보다 많게 서로 뒤엉겨 관계는 모호한데 그때마다 사랑이라고 하니까 난감할 따름이다. 그러나 사랑은 실제 신비하여서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잠 5:19).”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 13:4).”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 때는 ‘남들 다 그러듯’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요즘은 서로가 앞서 동거를 하는 것이 예사이고 그렇듯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 가벼워지는 것처럼 비인격적인 관계로 좋은 것을 두고도 서로는 서슴지 않고 이를 사랑이라 우긴다. 가상 세계의 것을 사랑하고, 우상화 하여 연예인을 좋아하는 그 이상의 감정으로 몸살을 앓기도 한다. 동물에게, 사물을 두고도 우리의 이 마음은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처럼 주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도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전 7:17).” 그 중심에는 주를 사랑함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일 또한 거룩하였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

 

친구의 피로한 몸과 마음을 쉬라 하고, 저의 안에 드는 자기 기준의 어떤 몰이해에 대하여는 겸손하기를 권하였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성경을 보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함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그리 두시는 동안은 은혜로 여겨 무던함으로 지켜야 한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전 9:9).” 오늘에 더하시는 것으로 족하였다. 중요한 사실 하나,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우리의 준비된 마음은 믿음이다. 믿음으로 더러는 이해도 초월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나는 저에게 일러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순간 교활한지, 때로는 바울과 같이 내가 나를 쳐 복종하게 해야 한다. 가령 지금 이 시간과 같이 나의 하루 일과 중에 이 시간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눈을 뜨고 너무 이른 새벽이라 해도 주 앞에 나오는 것은 한두 번의 예외가 나를 허용할까 하여 경계함이다. 굳이 열 장 정도의 분량으로 이 글을 이어가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과 글과 마음을 질서 있게 하기 위함이다. 내가 아는 나는 그리 강하지 못하다. 한두 번의 허용이 이를 잃게 할까 두렵다. 나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것은 허물과 연약함인 것이라, 나는 내가 모르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두고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못하고 할 수 없는 것을 두고 자책하지도 않는다. 나는 자유하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2).” 이것이 감격스러운 것은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23).” 내가 더는 내 것이 아니라는 데서 나는 위로함을 받는다. 그러니 더는 잘하고 못하고, 어떤 성과나 결과를 두고 씨름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그 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4).” 하시는 오늘 말씀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40).” 하여,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시 13:2).

 

세상이 너무 어렵고 힘이 들 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3-4).

 

그러므로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5).

 

이것으로 나의 마음은 충분하였고, 충만하심으로 나의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심으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이에,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