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전봉석 2024. 4. 3. 05:06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2:1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시 24:7-8

 

 

서로의 근심이 서로를 기도하게 한다. 한 영혼을 두고 저가 처한 현실을 주께 아뢰다보면 그 안타까움은 나를 돌아보아 감사가 넘치게 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누구신가?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 때, 어떠한든지 모든 현실은 감사가 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누구와의 통화에서 나는 저가 자신을 위해서도 그의 자녀를 위해서도 주 앞에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랐다. 신학까지 하고 주의 이름으로 산다고 살던 이가 어쩌다 조현에 우울이 겹쳐 꼼짝을 못하는 것인지, 심지어 아이는 지적장애에 조현까지 왔으니 엎친 데 덮치고 설상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할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의 가치관이다. 자신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아 6:1).”

 

말씀을 되새기며 나는 저를 생각하였다. 오후께 전화를 하여 아이의 근황을 묻고 저의 글쓰기를 조언하며, 부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자신이 의식하고 주께 의지를 구하여 일어나야 한다고 일렀다. 어쩌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자주 마주하게 되는데, 공통적으로 저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다. 각자에게는 사무치는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누구의 일을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고, 그것으로 자신은 눌러앉아 일어설 생각이 없다. 그러면서 누굴 부러워한다. 그 정도만 돼도 좋겠다고 한다. 자신이 훨씬 더 그러할 수 있는데도 그럴 수 없다는 생각으로 꼼짝을 않으면서 말이다.

 

결국은 인내와 절제가 필요하다. 바울은 오늘 자신의 결단을 알린다.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고후 2:1).” 근심으로 방문하는 데 있어 하기 싫은 혹은 늘어져 하고자 하는 것을 꺾는 것이 절제다. 절제는 모든 열매의 미덕이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서도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그러므로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결국은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25:28).” 그러므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여기서 어떤 가치관, 우리의 소중한 것을 되찾아야 한다.

 

한껏 아이 걱정으로 한숨이 깊은 것을 우선은 감사할 것을 몇 가지 전달하였다. 그래도 아이가 아침에는 학교에 간다. 금요일에는 교회 목사님과 ‘식탁교제’를 한다. 주일에는 교회를 간다. 싫어하면서도 그리한다는 데서 나는 훌륭한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어느 아이는 집에서 나오지 않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방에서 가족들과도 차단을 하였다. 아무리 그 부모가 어르고 달래고 윽박질러도 소용이 없다. 죽은 듯 방에 처박혀 게임만 한다. 아이의 끼니를 방문 밖에 두고 모든 가족이 집을 비워야만 그나마 끼니를 먹는다. 아이 또한 그 외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말도 없어서 허물어지듯 누워서 핸드폰만 본다고 하였다.

 

아이를 위해서도 엄마가 의지를 갖고 주 앞에 바로 서기를. 필요하다면 약을 먹고 의욕을 가지고 자신의 생활반경을 좀 넓혀가기를. 본인 또한 늘 수동적이라 저도 나가질 않는다. 하는 일이 없다. 적당한 나태와 게으름이 저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벌써 몇 번째 그 문제를 지적하고 아이를 위해도 본인이 활동하며 교회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자신을 놀리지 말라고 이르는데도 소용이 없다. 어떤 글쓰기 공모를 권해도, 무슨 말을 해도, 그래야 하는데… 하고는 도로 그대로다. 어제는 저에게 우리 영혼의 소중함을 말하였다. 우리 곁의 더 어려운 이들이 주가 주신 그 삶을 어찌 소중히 살고 있는지도 말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우리로 근심하게 하는 어떤 근심은 하나님이 놓아두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솔직히 저이 덕분에 친구와 자주 저를 두고 근심을 나눈다. 이로 기도를 한다. 서로 할 일을 의논하기도 한다. 주께 고하며 우리를 돌아보기도 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그래도 꾸준히 짧게나마 일상을 적어 올리는데, 나는 저의 글을 보며 저를 살핀다. 어제는 일주일 만에 통화를 한 것이다. 통화를 할까 말까 하고 나 역시 여러 날을 망설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에서, 한들 무엇 하나? 싶은 회의까지. 저를 두고 내가 생각이 많아지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이는 결국 약을 더 늘리고 다시 2주를 더 관찰하자고 했다는데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걱정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본인은 바뀔 의지가 없이 아이 이야기로만 말을 끌어가려는 저를 가로막았다. 엄마가 바뀌면 아이도 달라질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듣기 싫어서 더는 연락을 안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주가 행하실 것을 믿으며 나는 며칠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말들을 전하였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

 

어떻게 이처럼 상한 영혼의 아픈 사람들을 상대하다보니 나는 어떤 말을 두고 며칠씩 씨름한다. 안 보면 그만이고, 그러든가 말든가 내버려둬도 상관없는 사이겠는데, 주가 곁에 두시는 이시라!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나의 기도는 내게 더하시는 말로 저에게 바로 전할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란다. 친구가 성경구절을 두고 물었다. 대부분은 그 문맥의 흐름이 어려워서 이해가 더딘 것이다. 왜 주의 부활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함인가? 하고 물었을 때, 저의 죽으심으로 끝이었다면 단순히 순교와 다를 게 무엇이겠나? 우리가 믿고 말고 할 게 또 어디 있겠나? 십자가는 죽으심과 동시에 부활이 같이 있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신다. 예수의 죽으심은 희생이 아니다. 말했듯이 순교도 아니다. 부활이다. 영생의 삶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또한 예수는 왜 부활 후에 지옥에도 내려가셨나? 저들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이시기 위함이지, 어떤 이의 설교처럼 지옥에 있는 이들로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함이 아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고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 고통의 근원이 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안 믿는 자들의 경우는 상관없으나 믿는다고 믿으면서 그 믿음으로 고통당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알자!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이를 주의 백성들이 버렸다.

 

나는 아이엄마의 경우 저이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학을 하고 주의 일을 하다 결혼을 하고 그 다음 이야기가 도대체 어떠하길래 오늘의 지경에 이르러 그 영혼을 돌볼 의지도 상실했는가, 궁금하지만 묻지 않았다. 어제도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누군가 저를 위해 기도하고 근심하고 그 마음으로 축복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사 65:2-3).” 이제라도 주의 부르심이 들리기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7:13).”

 

스스로 자처한 이 모든 일의 결과를 두고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이만 탓한다. 아이를 걱정할 따름이다. 누구에게도 오죽하면 아이 일에서 좀 벗어나라고 일렀다. 마치 모든 게 다 아이 때문인 것처럼 말하는데 실은 자신의 영혼이 병든 것이다. 그 부모가 상한 심령을 방치하고 아이 탓만 하고 있는 것이다. 곁에서 봐도 아이는 그냥 둬도 지금보다는 낫겠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나는 요즘 아가서를 중심으로 읽고 또 듣고 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다 주께서 얼마나 우릴 찾고 찾으시며, 부르시고 또 불러 세우시는가를 알 수 있겠다. 이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17).”

 

내가 감당할 수 있어 오늘 내게 두시는 사람들에 대하여,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1-2).” 나는 두 가지 용기를 구하는데,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거절당할 수 있는 용기다. 나 역시 거절과 외면을 회피하려 하여 말을 하려다 망설이느라 그만두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본래 남의 일에 끼어들기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는데…. 주가 자꾸 그런 사람들을 붙이신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26).”

 

오늘의 저 어려움이, 저희가 처한 상황이 축복인 것을….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 그리하여 세상과 같이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이를 위해 죽이시더라도 살리시는 주의 은혜다. 조현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더해서라도 저희로 주를 찾게 하시려는 것인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 은혜를 알 때에 비로소 다시 일어설 수 있으려니.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2:4).” 그러므로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10-11).” 이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4).”

 

하여 오늘도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15-16).” 굳이 내가 이 일을 마다하지 못함은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7).” 곧,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24:1, 4).

 

이에,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7-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