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전봉석 2024. 4. 5. 03:03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8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시 26:3-4

 

 

친구가 물었다. 왜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해야 하나? 하는 것인데 다소 의아하고 뜬금없긴 해도,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하신 예수님의 직접적인 이유를 들어 답을 주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다고 해서 다 들어주신다는 게 아니라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3).” 곧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사실.

 

영광은 ‘표현한다’는 것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지만 이를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구하고 고할 때,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영광이 된다. 이르시길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3-34).” 이를 인정하는 데서 ‘예수 이름으로’ 우리는 기도한다고 설명하였다.

 

더러는 친구의 질문이 유치한데 그 의미는 새롭다.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행하던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또한 아이가 무슨 일을 두고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할 때 당황스럽다. 다 아는 것인데 그걸 모르겠다고 하고, 그것을 설명하려니까 순간 어떤 말은 어려워서 그것을 설명하다 새로운 진리 앞으로 이끌리기도 한다. 엉뚱한 듯 한데 전혀 새로운 곳으로 나를 이끄는 것을 볼 때면 누구를 주의 이름으로 대하는 일은 그 자체로 직분이 된다.

 

이에 오늘 바울은 낙심하지 않음을,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1-2).” 하는 말씀 앞에 오래 머물게 된다. 가령 흔히 성경공부라 하면 정해진 텍스트가 있고 주제가 있기 마련인데, 친구와의 성경공부는 무작위로 이뤄진다. 혹은 실제 삶 가운데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주로 묻는다.

 

이는 아이와의 대화에서 늘 돌발적인 상황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일과 같다. 어제는 두 개의 통장이 있는데 한 곳에 돈을 다 몰아두고 쓰는 게 나은지, 이를 나누어 두 곳에 두고 쓰는 게 나은지를 물었다. 아마도 이제부터 자신이 번 돈을 알아서 쓰라고 하면서 아이엄마가 그리 맡긴 모양이다. 나는 자신이 자주 쓰는 통장에 얼마를 넣고 나머지는 비상금으로 혹은 저축하는 의미로 모아두는 게 낫다고 말하였다. 실은 이 말을 설명하는데도 왜 그래야 하는지를 덧붙이는 일이 피곤할 정도로 지루하게 이어져야 했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직분이다. 나는 ‘아픈 이들’에게 어떤 것을 권하고 말로써 이른다. 그러는 데 있어 열에 아홉은 그러려니 하고 듣지 않고 하나는 아예 관심도 없다. 성경을 풀어 설명하거나 어떤 일을 두고 주의 뜻 안에서 받아들이는 일에 대하여, 나 역시 그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지혜를 구한다. 이는 곧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이와 같이 나의 어리석었던 날들이 나로 이해를 돕는다. 나는 저들보다 더욱 상한 심령으로 살았고, 그러는 동안 나의 완고함과 완악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오늘 이렇게 귀한 직분을 맡기신 것이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나의 날들 가운데 어느 순간 누군가의 기도가 또는 끝까지 참고 기다려준 결과가 오늘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로 인하여 낙심하지 않기를 놓고 주께 구한다.

 

가끔 누구와 통화하면서 다시는 관여하지 말아야지, 더는 가까이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신물이 난다. 누군 이래서 누군 저래서 그렇다는 것을 이해한다. 우울감에 의해 혹은 지능이 떨어져서 혹은 불안증으로 인해 그러는 것을… 하고 이해하면서도 순간 욱, 하고 올라오는 화로 나 자신을 점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 일을 무슨 이유로 감당하는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때로는 친구의 퉁명스러운 말투에서 혹은 아이의 더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이해의 절벽에서 주춤한다. 그러다 또한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나는 어떠했던가? 하는 곳으로 이끌릴 때면 욱, 하고 올라오던 감정이 누그러진다. 그때도 누군가는 나를 참고 또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오늘에 있어 누구를 사랑하는 일이란,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10).”

 

더러는 이와 같은 어려움이 나의 교훈이 된다. 힘에 겨울 때, 하나님은 적당히 또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마치 오전에 일찍 오는 아이와 사모가 열감기가 있다며 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문득 잘 됐다, 하고 안도하기도 하는 것이다. 누가 그래도 전날에 하루를 좀 더 아이를 위해서라도 부지런하시라, 하고 권하였더니 나름은 어제 하루가 바빴었는지 새삼 뿌듯하였다고 글로 썼다. 그러니까 알게 모르게 나의 말이 또는 권면이 누구에게 전달되어 저의 생활이 조금은 나아질 때,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살전 2:3-5).”

 

곧 누구에게 전하는 말씀 한 구절, 권하는 말 한 마디가 허투루 소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 부디 서로에게 그러한 힘이 있기를. 하여 오늘 바울은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전하여도 전달되지 않는 말에 대하여는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려니. 나 또한 이와 같이 내게 부여하신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다. 이는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 나의 약함과 무능함과 더는 어쩔 수 없다는 절망이 오히려 더 주의 이름으로 구하게 한다.

 

하여서,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2-5).”

 

이와 같은 말씀을 가만히 되뇌며 묵상할 때에 오늘 한 날의 의미가 말씀을 따라가고 있음을 확신한다. 그래서 바울은 강조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그랬겠다, 그래서였겠다. 누가 못 온다고 하니까 홀가분하다가도 또 누가 다소 애매하고 황당한 질문을 할 때 주가 주시는 이해와 지혜로 적절한 말을 고를 때,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어렴풋이 알겠다.

 

나는 비록 요란하지 않고 하는 일도 없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처럼 그러다 마는 처지에 놓이고는 한다 해도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 4:5).” 하신 말씀에 주목한다. 일찍 눈을 뜨고 잠시 더 잘까 하고 망설이다 그저 습관을 따라 이른 새벽에 차를 몰고 교회로 나오는 일 길 위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이와 같은 오늘 말씀으로 연관 지어 생각하면 너무 거창한 것일까?

 

내 곁에 있는 누구, 누구의 상한 심령을 두고 한숨지으며 주의 이름을 부르다가 내가 한심한 것 같을 때…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1-12).”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의 새로운 소망은 날마다 자라가는 일이었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16).” 이 놀라운 진리 앞에서 나는 진정 기뻐하는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내가 아는 것으로 성경에 이르신 바 주의 뜻을 온전히 나타내고 설명하여 저로 교훈에 이르게 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아이엄마가 변화되고 아이 또한 비록 평생을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해도 그런 가운데서 감사와 찬송으로 주의 기쁨이 되고 영과이 될 수 있다면.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6-8).”

 

우리가 서로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이 이 길을 가는 동안 더러는 원치 않는 일을 겪는다 해도 그것으로 오히려 주의 기쁨이 될 수만 있다면. 곧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 4:14-15).” 아, 나의 이 보잘것없고 하찮은 일이 주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될 수 있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이를 위해 오늘도 산다. 그러할 때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0-31).” 하여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갈 6:9, 빌 4:13).”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 26:1-2).

 

어찌 내가 완전하다 할 수 있겠나만 그리 행함은 주를 사랑함이었으니, 시 26: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나의 곁에 두시는 이들에게,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7).

 

그러할 때에,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