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20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 27:13-14
시련이 우리로 주의 길을 가게 한다. 우리의 호두껍데기 같이 단단하고 완고한 아집을 깨뜨리시기 위해 하나님은 나와 다투신다. 상식과 비이성적인 일로 시달리다 어느 순간 인정하게 하신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한 것이다. 이에 바울은 모든 일을 겪고 우리에게 간청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곧 우리의 장막, 이 땅의 삶은 무너질 것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1).” 이로써 우리의 영원한 집이 있었음을 안다. 고로 무너져야 알고 알아야 구한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2).” 나는 나의 지나온 날들을 돌아볼 때 바울이 간청하듯 권하고 또 바라는 저 마음을 알겠다. 모든 게 다 내가 옳은 줄 알았다. 나는 이런저런 주의 은혜가 은혜로 여겨지지 않아 고달팠다. 나의 아집은 단단하였고 그에 따라 하나님을 멀리하며 살고자 했다.
그럼에도 주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심이 기이하다.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3).” 주의 날에 부끄러운 영광을 보지 않게 하시려고,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4).” 내가 벗고자 하였던 것으로 주는 덧입히신 것이어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셨다.’ 내가 죽어야 내가 사는 일이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5-26).”
이 땅에서의 평안을 구하여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일은 덧없다. 그렇게 나의 인생은 허비되었고, 나는 이 모든 일을 인정하며 동생을 위로하였다. 결국은 굽혀야 하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주 앞에 엎드리기까지 주는 모든 상황을 몰아가고 계셨다. 여기서 관건은 촉법소년법의 폐단이나 저쪽 아이엄마와 아이의 간악함이 아니었다. 또한 우리의 억울함이나 어떤 서러움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내가 사랑하는 육의 형질을 벗고 오직 주를 인정하는 데서 영원한 영생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그러므로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전화 저편에서 동생은 훌쩍거리고 있었고 나는 마음이 아팠으나 이 순간이 어느 훗날 은혜의 간증이 될 것이라 믿었다. 내가 그때마다 그것을 부정할 때면 10년씩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만큼 나의 완고함은 주의 사랑을 인정하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야 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기까지, 가나안에 앞서 광야 40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던 것 같이, 오늘의 바울이 있기까지 사울의 그 긴 시간이 주를 대적하였던 것 같이… 우리가 옳다고 여기며 살았던 것을 놓기까지.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때론 이와 같은 기다림이 잔인하기만 하다.
새로 변호사를 선임하고, 저는 연대 신학생으로 목회자의 길을 가려던 것을 변호사가 되게 하신 이로서 오늘의 이 모든 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파악하였다. 오늘 이 일은 악을 상대하거나 저들의 악의적인 모순을 드러내려는 게 아니다. 저들은 어떠하든지 악하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나 자신, 하나님과 나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이 땅에서는 억울하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리가 아니다. 곧 가까운 날에 영원한 심판이 있을 것을 아는 게 지혜다. 여기서 관건은 주 앞에 나를 내려놓는 일, 주를 인정함으로 내가 얼마나 그릇된 자인가를 인정하는 일. 그리하여,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7).”
결국은 나의 자아가 나의 육의 형질이 죽지 않으면 그만큼 더 고통스러운 게 성화였다. 우린 너무 낭만적으로 성화구원을 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 누군 지금 조현을 앓고, 우울증에 불안까지 겪고 있는 것이다. 누군 자식 일로 애간장이 녹는 세월을 보내고, 누구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남을 어지럽히면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동생의 여러 상황을 듣고 내가 겪었을, 지금도 여전한 나의 자아의 싸움을 말해주었다. 믿는 자로 주 앞에 선다는 일은 서로의 모양은 다를 뿐 저마다의 깨어지고 으스러져야 하는 단단한 자아와의 싸움이었다.
그럴 때 성령이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되신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 이로써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되는 거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6-7).” 다들 저마다의 옳고 그름을 가지고 살고 있으나, 하나님을 인정하기까지는 헛손질과 헛발질로 고달플 따름이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너무 멀리 돌아서 왔다. 너무 오랜 시간을 주를 대적하며 살았다. 내가 옳은 줄 알았고, 뭐 그리 잘못한 것이겠나? 하는 아집이 나를 단단히 여미고 있었다. 그것으로 주의 영을 근심하게 하였으니,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내 곁의 여러 인물군을 보다보면,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나 역시 저들의 어쩔 수 없음에 초점을 맞추고 이해하려 했지 정작 이 모든 것이 주를 대적하는 일인 것을 외면하였다. 하나님은 이해 받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설명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는 동안 야곱의 시간은 형을 속였고, 밧단 아람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험한 세월로 험난하였다. 결국은 마하나임의 교제에 이르기까지, 이에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아 6:13).”
우리는 모두 주의 신부로 술람미였다. 주는 돌아오라 부르신다. 우린 다른 데서 주를 대체해 줄 것을 찾고 있었다. 야곱은 이로써 라헬을 사랑하였고 그 긴 시간을 더듬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그와 같이 허투루 보낸 시간마저도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을 형성하여, 420년의 장구한 시간으로 거대한 주의 백성을 형성하셨다. 나의 날들 가운데 내 곁을 지키게 하였던 이들이 있다. 더러는 안 믿는 자들이었고, 타종교인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은 그들로도 나의 길을 가는 데 돕는 자로 세우셨다. 바로가 바로의 시대에는 필요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동생을 위로하며 마음은 어려웠으나 주가 함께 하심을 단언할 수 있었다. 반드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하신 것처럼 오늘의 이 일이 선을 이룰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 앞에 설 것이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후 4:14).” 이를 위하여,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렇듯 다 이루신 일 뒤에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우리로 담대히 주 앞에 나아올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오늘의 이 모든 일을 예비하신 거였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왜냐하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10).” 그날에 더는 번복할 수 없는 때가 이르기 전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14).” 결국은 내가 죽어야 내가 산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15).”
이 놀라운 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믿음이 없이는 이 모든 일을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다. 믿음을 그저 그리 여겨 고백하는 일 정도로 삼을 때는 몰랐다. 그러나 이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바로 저 믿음의 결국, 이를 이루기까지 우리는 이 숱한 질고의 시간을 겪고 있는 것이다. 행여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었다. 여전히 자기아집으로 묶여 사는 때는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6-17).”
오늘 말씀은 그 자체로 오늘의 난제를 풀 수 있는 열쇠이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까닭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18-19).” 어떤 이의 말 못 할 고통을 두고, 또는 저의 억울한 심정을 이해할 때, 그 이유는 분명하였다.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20).”
죽음도 초월하여 이 일을 이루시기까지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잠 3:24).” 고달픔으로 몸부림칠 때는 몰랐는데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사 26:8).” 결국은 영혼을 사랑하는 일로 오늘의 이 육신의 여러 무게가 거름이 되었다. 때론 억울하여 누군 그 일로 지능이 멈추고, 누구는 자기 안에 갇히고, 남에게 총구를 겨누면서… 우리 영혼은 살려달라고 외치는 거였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얼마나 오랜 시간을 내가 날 속이며 살고 있었는지를.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7).” 아,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1).
다른 모든 문제는 문제될 게 아니었다. 정작 문제라고 여기는 것과 상관없이 문제는 영혼이었다. 이를 알게 되면서,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4).
무엇이 귀하고 또 선한 일인지를 알게 되면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11).
그리하여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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