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전봉석 2024. 4. 7. 04:00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1-2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 28:7

 

 

오히려 어렵고 힘든 때가 은혜의 때이다. 믿음으로 모든 게 좋을 거라 여기지만 좋지 못한 날이 더 많다. 힘들고 어려운 때가 더 흔하다. 그래서 믿음으로 바라는 것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말도 안 되는 때에 주가 나를 찾으시고 용서하시고 함께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15).”

 

이 귀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지금이 바로 이 은혜를 받을만한 때라고도 하신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2).” 오늘의 이와 같은 ‘지금’ 앞에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사 49:8).”

 

주의 재림이 곧 그의 영광의 날이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믿음으로 우리는 이 날이 가까웠음을 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우리 의지와 노력으로는 할 수 없지만 우리 믿음으로는 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8).”

 

그러므로 ‘지금’ 때로는 너무 힘들고 좌절과 실망이 목을 조이는 것 같은 때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그러므로 주가 함께 하심을. 오늘의 이 모든 ‘지금’이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알 때에 우리는 거리끼지 않는다. 당하면서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주가 다 아심으로 우리가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의 직책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고후 6:3-8).”

 

때론 터무니없고 답답하고 억울하기만 할 때에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믿음으로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다른 무엇으로 견디겠으며 이겨낼 수 있겠나? 비록 ‘지금’의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세상이 알 수 없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믿고, 믿음으로 견딘다. 곧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 1:11-12).” 그러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어쩌면 우리는 ‘지금’의 이 어려움으로 주께로 더 가까이 간다. 어제는 여러모로 마음이 어려운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혼자 걷다 어느 카페에 들어가 하염없이 오가는 사람들과 밀린 차량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거칠었으나 훈훈하였고, 선거일을 일주일도 안 남긴 도로 위는 시끄러웠다. 나는 마치 도시에 갇힌 사람처럼, 혼자 떠있는 섬 같이 잠시 외롭기도 하였다. 딱히 누구 만날 사람도 없었고 어디 전화를 하여 통화하고 싶은 상대도 없어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놓아두었다. 동생 일로 마음이 어려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이 은혜의 때인 것을 확신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 시간이 어려워서, 나는 울면서 운전을 하고 다녔고 혼자서 시달리다 공황이 오기도 하였다. 그렇게 3년을 신대원을 하고, 두 번의 목사고시에 떨어지고, 이 길이 아닌가 하고 있을 때 ‘광야 40년의 시간’이 끝나고 ‘가나안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날마다 전쟁이고 매시간이 전투의 현장이다. 그러면서 나의 영토는 확장되었고 나의 영광은 더욱 커져가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곧 성경의 날들이 오늘인 것을…. 고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비로소 위에 것을 찾게 되었을 때 ‘지금’의 이 모든 게 부질없음을, 붙들고 나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정도로 가치 있는 게 아니었음을…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곧 오늘의 이 모든 ‘지금’이 우리로 더욱 강하여져 주만 의지하게 하여 심지가 견고한 자로 세우시는 거였다. 곧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3).”

 

이는 우리의 의지로도 믿음으로도 아니요, 오직 주 앞에서 주를 의뢰하는 것으로 증명되는 일이었으니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그러므로 믿음은 실전이고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였다. 이 의로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곧 ‘지금’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 인한, 하나님의 시간으로 내가 얼마나 이를 인정하느냐에 따라 그 확신은 현실이 된다. 이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솔직히 나는 목사 안수식의 순간이 기억에 없다. 너무 긴장하고 죽을 것처럼 불안하여 안정제 약을 많이 먹기도 하였지만, 그때에도 나는 자격이 없고 주 앞에 송구하기만 하여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던 것만 생각난다. 이후 거짓말처럼 글방의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듯 더는 글방이 아니라, 주일에 교회로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모든 게 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현실적으로는 감당이 안 되고 의지적으로도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그때에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믿음으로’ 뿐이었다.

 

알아서 하시라,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망하게 하시든지 그만두게 하시든지. 분명 여기까지 나를 강권하여 이끄신 이가 주님이신 것을 알면 알수록…. 그러한 확신이 들면 들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체념이 아니라 수긍이었다. 자포자기가 아니라 받아들임이었다. 그 차이는 의지적인 것으로 주를 인정하는 데서 오는 능력으로였다. 내가 주를 바란다는 실상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못하겠다고 하면서 이를 알았다. 분명히 나는 못하겠다고 하는데도 주가 ‘그 자리에’ 나를 보내셨고, 주가 ‘이 말씀을’ 풀어 설명하게 하였으며, 나로 저를 권하여 주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증거하게도 하셨다. 정말이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오늘에 이르러 ‘지금’에도 우리 곁에 함께 하시는 이들을 볼 때 나는 싫은데, 싫어서 슬그머니 모르는 척 하려 하는 데도 어쩌다 모두가 ‘상한 심령’이라. 나는 저들이 어째서 나에 그런저런 것을 묻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의사도 아니고 전문적인 상담사도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나 역시 환자이고 하루 네댓 번씩 여전히 안정제를 먹으며 헐떡거리는 나약하고 어쩔 수 없는 존재인데, 그래서라면 그거야말로 아이러니할밖에. 굳이 왜 나 같은 자로…. 하나님도 그러하시지만 내가 말로 어찌 권하고 위로하고 말씀을 들어 설명해야 하는 저를 향하여….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9-13).”

 

나는 나의 이 아이러니한 ‘지금’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고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어제도 창밖을 내다보며 두어 시간 아무 것도 않고 카페에 앉아 시선을 멈추고 있으면서 알았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시 40:2).

 

이는 나로 하여금,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3).

 

그리하여 종종 나는 나의 처지를 두고 오히려 힘을 얻는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힘을 낸다. 그것으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42:5, 11).

 

나로 하여금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구할 수 없는 중에 구하게 하시려고 때론 이 궁지로 몰아 ‘지금’을 조성하고 계시는 일이었으니, 하나님의 관심은 ‘지금’의 일이 아니셨다. 오늘 어찌 되는 것, 누가 이기고 지고, 승전가를 부르고 패전가를 부르는 따위로 우리를 세우시려는 게 아니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지금 이 상황에서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하라 하심인데, 이는 저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아, 주가 나를 사랑하신 대로 나로 나의 원수를 사랑하게 하심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28:1-2).

 

이와 같은 때에 주가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 그러할 때에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4).

 

주가 행하실 것을.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

(7-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