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 41:11-12
저를 바로 세워 주의 일을 하게 하려면, 아이를 학교로 보내야 한다. 아이의 어눌한 말투와 판단과 사고 능력의 퇴행은 또래와의 교류에서 해결될 거였다. 일거수일투족 아이의 일에 정신이 팔려 사는 저로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다할 수 없다. 한 달 남짓 아이를 만나면서 나는 더 늦기 전에 아이를 학교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정이 아이를 교육할 능력이 안 된다. 아이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그 안에서 치유될 것이다. 그 부모는 각자 주어진 사명에 보다 충실하려면 그 또한 필요하였다.
이를 설명하는 일이나 알아듣는 일이 그렇게 불가능한 것일까?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잠 14:15).” 뭐라 아무리 이르고 애원한듯 설명해도 소용이 없는 듯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점점 더 학교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고, 그 부모는 아이 일로 너무 소진될 것이다. 그런데도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12:15).” 그러니 말을 하면서도 괜한 말을 하는가? 나는 되묻게 되었다. 아, 우리는 참…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26:11).” 결국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16).”
어차피 계획된 내달 초에 있을 선교여행은 다녀와서, 그 전에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마치고, 학교 다니면 그때 다시 오라고 했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나서는가? 하는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혔지만 그렇지 않고는 시급한 게 글쓰기가 아니었다. 아이의 언어치료나 정서적자아치유가 필요하였다. 서로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다. 부모의 불안이 아이를 떼어놓지 못한다. 이는 믿음의 문제다. 나는 그리 설명하였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2-14).”
나는 아이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과 같다면 아이의 삶 속에서 아이와 함께 하시기를,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다. 설령 사랑이 문제라면 절제가 필요하다. 절제가 없는 사랑은 애착에서 집착으로, 집착에서 자가당착으로 흘러 마치 사랑을 자기 소유로 삼을 것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19-20).”
오후께는 서로 가족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쩌다 저런 것일까?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치를 떨었다. 저가 당하는 일에 가족 중 아무도 서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돈벌이에 있어서는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 서로를 필요로 하는데, 거기까지다. 남보다 못한 관심과 그 거리가 서로에게 의지는커녕 남만 못한 관계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오죽하니 친부모 맞나? 하는 나의 질문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오늘 말씀은 일거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곧 서로의 잘못은 나의 거울이 된다. 누구 탓을 떠나 나의 오늘을 돌아볼 수 있다. 이에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하는 당부가 어떤 의미인지 알겠다.
늘 해놓고 나면 후회가 밀려든다. 무의식적으로 그냥 둘 걸 그랬나? 하는 망설임이 따른다. 학교를 보내고 안 보내고, 가족이 서로 반목하고 남만 못한 사이이든 어쩌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을 두고 내가 씨름할 일은 아닐 텐데도.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난들 저보다 나은 게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어서 나로서는 선을 그어주는 게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럼에도 같이 가면서 어떤 대안을 찾아야 하나? 하고 여러 날 생각하다 아침에 더는 그리할 수 없다는 마음에서 단호하게 굴었다. 그래놓고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1-12).”
내가 마음이 어려운 까닭은 나로 이 일을 통해 나를 돌아보게 하는 일이었으니,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 2:6-8).”
일련의 상황을 두고 내가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나의 믿음이 혹은 서로의 믿음이 그 정도인 것을. 아이가 겪을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강조하느라, 나의 날들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말하고 또 고백하고 싶었다. 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그때마다 곁에 함께 계셨다. 나는 이를 확신하며 강조하였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4-5).” 오늘 말씀은 우리 안의 자긍심이 자만함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자랑, 나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자긍함이 저에게도 마땅히 그리하실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전달되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사 5:21-23).” 그러므로,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사는 게 다들 너무 고달프다. 서로의 공통점은 안주하고 막연하여 스스로는 괜찮다고 여기는 일이다. 엄마가 진취적으로 자신을 돌보면 모든 문제의 반은 풀린다. 문제가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너무 가까이 턱을 고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선은 흐려지고 시야는 좁아서 정작 봐야 할 전체를 볼 수 없다. 그래서도 조금은 떨어지길, 서로 거리를 두어 아이는 아이대로 충분히 아이에게 부여하신 삶을 살게 두기를 권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다. 이 또한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엄마의 문제다.
아직도 집으로 와서 수업하는 ‘똥싸개’는 벌써 5학년이 되었다. 5년을 가까이 지내면서 아내는 여전한 아이의 어려움에서도 소망을 본다. 무엇보다 아이엄마가 독하다. 아이의 모자란 상태를 알면서도 가차 없다. 아파도 길에서 쓰러지는 한 학교를 보낸다. 쫓겨나도 다른 학원을 알아본다. 친구들에게 맞고 들어와도 아이 편을 들지 않는다. 아이는 그에 따른 억울함을 똥 싸고, 막말하고,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것으로 표출하였다. 그러면서 어느새 5학년이 되었다. 아이는 친구와 어울려 교회를 간다. 아이엄마는 주말 새벽까지 장사하고 피곤한 일요일 아침, 아이를 교회까지 태워다 준다. 본인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면서, 아이의 변화에 대해서는 감사해한다.
주께 맡길 때 해결될 일이다. 늘 나의 결론은 그것이다. 기어이 자신이 쥐고 놓지 못하면 결국 쥔 채로 끌려 다녀야 한다. 아무리 뭐라 일러도 자신이 쥔 것인지, 묶인 것인지, 속수무책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짐을 져야 하는 책임이 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아이의 것은 아이가 지게 해야 한다.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고 같이 안 놀아준다면 왜 그런가? 하고 자신이 알아내게 둬야 한다. 이를 나서 엄마가 대신 가려주거나 막아주려니까 오늘의 이 사달이 났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스스로 고할 줄 알아야 스스로 하나님과 관계한다. 엄연히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때 서로가 산다. 하여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그러려면 가르침을 받는 그 가치를 알아야 하는데,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 스스로 옳다 여기는 한 어림없다.
결국은 육의 문제와 영의 문제로 나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 이는 확연하여서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가 공존하는 가운데,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 이에 믿음으로 우린 인내한다. 인내는 사랑보다 강하다. 사랑은 실체이지 말에 있지 않다. 나는 ‘똥싸개 엄마’의 강단이 어지간한 믿음 있는 자보다 낫다고 여긴다.
하나님을 안다,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의 안달로 못 견뎌야하는 이에게 무슨 말인들 도움이 되겠나?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 나는 오늘 말씀으로 내가 지금 마음이 어려운 것 또한 미련이거나 아쉬움이려니 하고 풀어낸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은 아닐까?
마음이 어려울 때 오후께 또 한 가정의 서로의 반목과 이상한 공생관계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우리 영혼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상했다.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오라 하시는데도 어쩜 그렇게 듣지를 못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더는 다가갈 수도 오게 할 수도 없는 지점에 서서 속수무책으로 난감하였다.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11).” 이에,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41:1).
이는 곧,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112:5).
부디,
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41:2-3).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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