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후 2:16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시 62:9
권능은 하나님께 있다. 그 마음을 돌이켜 주를 바라게 할 능력이 내겐 없다. 다만 주께 바라고 저에게 전함으로 역사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모처럼 누가 전화를 했다. 잠시 망설이다 통화를 하고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으며 지루하였다. 서로 그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으로 귀결되지 않는 대화에는 이제 힘이 든다. 상대적으로 누군 주의 일에 있어 자신의 노후대책이 안 돼 지금은 할 수 없다고 했다. 저는 꿈꾸었고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그것으로 마음은 있으나 주의 일에 선뜻 전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세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레바논 깊은 산속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는 나중에 거대한 배가 되어 먼 바다를 활개치고 싶었다. 또 한 그루의 나무는 왕궁에서 가장 화려한 기둥이 되고 싶었다. 또 한 그루의 나무는 성전에서 거룩한 제단의 뿔이 되고 싶었다. 각각 나무는 곧게 자라서 베어져 하나는 말구유가 되었고, 하나는 십자가의 형틀이 되었고, 하나는 가난한 어부의 고깃배가 되었다. 그 신세는 처량하고 볼품이 없어 서로가 꿈꾸었던 희망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구유에 아기 예수가 누이심으로 저는 졸지에 인류의 구원자의 요람이 되었다. 작은 고깃배에 올라 예수께서 천국복음을 전하시자 저는 성전의 강단이 되었다. 극형의 틀이었던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보혈을 흘리시자 저는 구원의 표징이 되었다.
이 우화를 들려주며 저가 자신의 처지나 상황을 처량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 그곳에서 예수가 모셔짐으로 저는 그 어떤 왕궁의 화려함보다 영광스런 메시아의 요람이다. 예수께서 오르사 천국 복음을 전하실 때 더는 가난하고 비린내 나는 고깃배가 아니다. 수많은 죄인들의 피로 얼룩져 더럽혀지던 십자가에 예수의 보혈이 흐르면서 모든 믿는 자의 구원의 자리가 되었다.
우린 오늘도 예수의 재림의 기다림으로 산 소망을 가지고 산다. 이에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살후 2:1-2).” 오늘 본문은 우리가 들었고 읽었고 생각하는 모든 게 다 주를 바람으로 영광스러운 것이니,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7).”
이에는 우리 은사가 부족함이 없다. 주신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주의 권능으로 행함이다. 그에 앞서 스스로가 노후대책을 운운하고 사는 데 따른 우선순위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 쓰임과 역할이 다르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의 것으로 이루는 게 아니다. 이쯤 나이가 들고 보니 저마다 생각처럼 사는 게 그리 녹록하지가 않았음을 인정한다. 하나 오히려 볼품없는 구유에서 요람으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부요한 복음이 전파되는 강단으로, 끔찍한 형틀에서 구원의 자리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3-14).”
오늘 우리는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세상 그 이상의 세상을 산다. 그렇게 나는 누구에게 말해주며 스스로 애써 인생을 맞이하는지, 주와 함께 생각지도 못했던 모험을 떠날지 물었다. 인생이란 그래봐야 인생이란…….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시 62:9-10).
누구에게 들려준 말이 저의 속에서 어떤 작용을 일이키며 분화하여 그 영혼을 흔들어 주를 더욱 바라게 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가끔은 내가 말하면서 말하시는 이가 계심을 느낀다. 이에 말씀을 바로 알게 하시기를,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그동안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날을 통회하며 자복하는 영혼들이 무모할 정도로 그 남은 생을 주와 함께 하길 바란다. 저들의 바람을 나는 귀히 여기며 그것이 주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가질 수 없고 누가 강요하여 될 일도 아닌 것을 잘 안다. 이처럼 나로 주 앞에 올라오게 하심도 나의 의지가 아닌 것을 인정한다. 오후께 아이가 와서 연차랍시고 같이 늦은 점심을 먹고 교회로 올라와 시간을 보내고 갈 때, 그리하고자 하는 마음과 시간을 열어주심도 주의 권능으로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그런 가운데 우릴 미혹하는 바,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3-4).” 우리가 바라는 신앙도 미혹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은 스스로 자신의 이해와 판단을 구하고자 할 때이다. 그럴 때마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7).”
오늘 우리 곁에 너무 많은 정보와 거짓복음이 난무하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의도로 주와 함께 하는 일을 말했는데 저는 어떤 이의 심리학책을 권하면서 보편적인 이상 현상을 말하였다. 나는 저에게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한 게 아닌데 저는 그저 그렇더라는 식으로 자신과는 무관한 이야기로 들었다. 이 또한 전달에 있어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주의 권능으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62:11-12).
각자 나름의 판단과 이성으로 이를 접근할 때 복음보다 이상적이고 신앙보다 무모한 현실은 없다. 안 믿는 자를 상대로 나는 이를 뒤집을 수 없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막 13:21-22).” 너무 많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게 아닌데, 하고 말하려고 하면 벌써 저는 나를 이상하게 여긴다. 혹은 ‘목사니까!’ 하고 선을 긋고 자신과 다름을 강조한다.
그때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3-4).” 나는 이를 저에게 어찌 바로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할 사이도 없다. 그저 나는 선포할 따름이다. 친구와 성경공부로 대화할 때도 나는 저를 설득하거나 이해를 돕는 자가 아님을 자주 되새긴다. 주가 더하실 때 나는 선포하는 자일뿐이다. 듣거나 말거나, 받거나 말거나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가랑비에 속옷 젖듯 친구는 자신들의 곁의 ‘아픈 모녀’를 두고 자주 말을 하고 관심을 둔다. ‘우리 아이’의 경우도 처음부터 오늘처럼 말씀을 매일 필사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주신 가운데서 열심히 주를 바라며 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저의 동굴 속에서 끌어내기까지 무던한 인내가 필요하다. 친구는 아이에게 종이접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면서 지적장애가 우리의 이해를 필요로 하는 다른 세계인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마치 책을 읽을 때 저들은 여러 페이지를 한꺼번에 넘겨서 몇 줄 읽는 것 같다. 같은 책을 놓고 서로 다른 이해와 세계를 사는 것이다.
경험상 아이의 관심을 관찰해야 한다. 우선은 그림책과 색연필을 권했다. 그려진 그림에 여러 색깔을 입혀 아이의 집중과 그 자신의 즐거움을 관찰하는 것. 혹은 음악이나 손놀림이나 보는 것을 살펴 무엇에 집중하는가를 지켜보라고 권하였다. 앞서 ‘우리 아이’도 이런저런 걸 다 해보다 우연처럼 운동을 하게 되면서 그에 따른 몰입과 일상의 안정이 자리 잡은 것이다. 이제 아이는 충동적인 구매나 과소비를 피한다. 어려워하긴 하나 충동을 자제한다. 무엇보다 규칙적인 생활로 자신의 하루를 ‘알차게’ 보내려는 마음이 훈련이 되었다.
나는 친구에게 아이를 속단하지 말 것과 스스로 판단하여 섣불리 결정을 하려 하지 말 것도 조언하였다.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은 저의 온 우주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변덕이 심하고 말에 대한 책임이 결여되었는데, 이를 문제로 알지 못한다. 오겠다 하고 다음으로 미루고, 약속한다고 하고 뒤집는 일은 다반사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아픈 것’이란 생각을 우선 앞에 둔다. 이해는 상대를 겨냥하는 것이지 나의 기준이 아니다. 나의 기준으로 하면 억압이 되어 속단할 수밖에 없다. 가령 아이가 굳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친구가 물었다. 저가 봤을 때 의미 없음으로 비춰지겠으나 나는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는 아이의 방식으로 습득하는 세계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무엇보다 졸업장도 중요하다!
다 똑같지 뭐! 하는 판단은 금물이다. 모든 사람의 지문이 다르듯 하나님이 다루시는 모든 사람의 세계는 다르다. 자신의 세계로 누구의 세계를 판단하지 말 것.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이는 우리가 취할 자세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여기에는 자신도 포함이다. 그래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이는 곧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자칫 누구에게 속는 일보다 자신에게 속는 게 더 흔하다. 자긴 다른 줄 안다. 아니라고 한사코 자신을 제외시키려 한다. 이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러한 마음으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62:1-2).
다른 수 없다. 백날 어떤 노력과 수고로도 감당할 없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성경을 기준으로 좌우 정렬하여 자신을 규칙적으로 바른 길 위에 놓을 때,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103:19-20).
이에,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4).” 하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6-17).” 하여,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62:5-7).
그러므로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12).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0) | 2024.05.13 |
---|---|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0) | 2024.05.12 |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0) | 2024.05.10 |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0) | 2024.05.09 |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0) | 2024.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