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전봉석 2024. 5. 15. 04:59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딤전 3:16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 66:9

 

 

자기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용기면 어떤 어려움도 대면할 수 있다. 완전히 혼자라고 여길 때 자기 이야기를 말함으로 스스로를 객관화시켜 빼앗긴 언어를 회복할 수 있다. 나는 내 곁의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조현병을 이겨낸 심리학자’가 쓴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아른힐 레우뱅, 생각정원.)는 책을 샀다.

 

그리고 이 아침에는 말씀 앞에 앉았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스스로 자신을 바로 하여 직분을 감당하는 이에게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16).” 하고 예수께로 우리를 앞장세운다.

 

‘목사’가 되기 싫어 참 오랜 세월을 피해 다녔다. 남의 인생에 참견하기 싫었고 더욱이 그 영혼의 일을 붙들고 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어떤 경우에도 죄의 문제를 운운하기 싫었다. 일찍이 어려서 아버지가 붙들려 강권하심으로 목회에 전념할 때 가족이나 자식의 입장으로서는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남의 일로 정작 자신과 자식의 일에는 소홀한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직분’을 사모하는 것의 아름다움에 대해 첫 줄을 선포한다. ‘선한 일을 사모하라.’ 하심으로 이 일이 선함을 선포한다.

 

선포한다는 것은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니다. 요즘 나는 친구와 통화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 점을 자주 언급하게 된다. 저는 말씀의 선포는 물론 권면을 듣기에도 더러는 자신의 동의와 이해를 우선 요구한다. 성경을 설명하다 자주 듣는 소리가 ‘동의할 수는 없지만…’ 하고 알겠다는 답을 한다. 그럴 때 나는 너와 나의 동의를 구하시는 게 아니다! 하고 외친다. 복종이 순종보다 우선한다. 억지로라도 이에 따르는 것이 복종이다. 마치 군대의 체계와 같다. 이는 어린아이일 때도 그러하다. 하라, 하지 말라, 하는 데서 속상하다. 그러나 곧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롬 11:13-14).”

 

더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훼방하는 것이 병이다. 특히 정신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몇몇 같이하다 보니 저들의 감정소모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우울하고 걱정이 앞선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자신을 다잡아도 소용없을 때 약물을 의존한다. 나는 이 또한 권한다. 마치 정신의 문제는 의지에 달렸다는 식의 공식은 틀렸다. 믿음의 문제와도 다르다. 흔히 나 역시 자주 듣는 소리가 믿음으로 이겨내면 되지! 하고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핀잔을 더러 듣는다. 하긴 목사가 불안과 우울을 호소한다는 게 아이러니한 일이기는 한데, 나는 이제 그런 말과 판단에 휘둘리지 않는다.

 

팔 다리가 부러졌을 때 믿음을 운운하는 멍청이는 없다. 이것은 일종의 사고와 같다. 출렁, 하고 파장이 일면서 감정의 수면이 출렁거릴 때 의지나 사고와는 별도로 유난히 그 파장이 오래가거나 더욱 거세지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이를 자기 이야기로 받아들일 때, 같은 출렁임에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요령이 생긴다. 나는 이 또한 주가 맡기신 십자가로 본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그래서 나는 누가 어떤 일로 마음을 열기 어려워할 때 내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먼저 알려준다. 자랑할 것도 아니지만 부끄러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것으로 무엇에 쓰시려고 그러는가? 하는 점인데, 그래서도 나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라는 첫 걸음이 된다. 모두는 대체로 쉬쉬하고 특히 저 영혼의 문제에는 너무 예민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둘 중 하나다. 둘 다 그릇된 이유는 스스로 어떻게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오만함에서 남은 물론 자신도 속단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 3:8).”

 

나도 내가 ‘이런 목회’를 할 줄 몰랐다. 뒤늦게, 그것도 그렇게 싫다는데 억지로라도 끌어다 주가 세우신 자리면 뭔가 있을 줄 알았다. 남부럽지 않은 어떤 성취감과 가시적인 성공도 기대했다. 신대원을 다니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발표를 한 적도 없다. 남들 앞에 설 수 없는 내 자신의 이상한 반응이 나를 또 우회하게 할 때 나는 이를 동기들과 교수들에게 모두 공개했다. 저들의 이해와 관용으로 나는 은혜로 입학하고 졸업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게 어렵게 목사가 되고, 한 살 위 교수가 학부에서의 강의를 제안했다. 물론 학위가 없는 나로서 그 교수 목사님이 강좌를 열고 내가 특강형식으로 하는 ‘고전에서 성경 읽기’와 같은 내용의 책 읽기와 글쓰기를 위주로 하는 교양과목이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만큼 하나님이 그것까지 막으시는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동안 그 일로 하나님 앞에 토라져서 칩거 아닌 칩거로 항변했던 것도 사실이다. 기도도 했고 낫기를 바라기도 수십 차례다. 그런 가운데 내 의지와 상관없는 범불안증은 듣기로 가장 까다롭고 고약한 정신과적 문제라고 들었다. 아예 어디가 하나 문제인 게 아니라, 두루두루 모든 게 다 섞여 있는 것이라 지금도 그때마다 안정제 외에 다른 치료방법이 없다고 한다. 나 역시 더는 낫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 이를 인정하면서부터 나와 같은(?) 처지의 상한 심령과 영혼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모였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제 몸 하나 운신하기 어려운 처지에 사백 여명의 ‘그런 사람들’이 모여든 것처럼,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 22:1-2).” 덕분에 나 역시 저들을 알기 위해서도 공부가 필요하였다. 공황이나 우울, 불안과 조울, 조현에서 강박까지… 왜들 그러는 것일까? 하고 이해하기보다 그리 알고 인정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로 주 앞에 세우고자 노력한다.

 

감사하게도 폴투르니에, M 스캇 펙, 윌리엄 쿠퍼 등 주를 사랑함으로 정신질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것까지도 주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데 유용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 이른 아침이면 눈을 뜨기 무섭게 교회로 달려온다. 말씀 앞에 앉히고 나의 이야기를 묵상글로 쓴다. 내 곁의 누구 이야기나 더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주께 아뢰며 묻는다. 누군 같은 교회에 지적장애로만 알고 있는데, 서른다섯 된 아가씨의 괴팍한 성질과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 같은 순수함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좋아라, 한다며 말했다. 또는 친구에게 그 ‘아픈 모녀’의 사정과 형편을 주의 마음을 대하고 위로하며 사랑하기를 권하였다.

 

우리에게 직분이란,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 2:15).” 곧 하나님은 경건한 자의 손을 얻고자 하신다. 우린 주의 손이 되어 곁의 아무개를 잡는다. 저는 ADHD로 그 엄마도 아이와 같다. 둘이 같이 오면 정신이 없다. 말이나 생각도 뒤죽박죽이다. 저들이 왔다 가면 치우는 게 일이다. 누군 그저 우울하다. 자신이 왜 우울한지 모른다. 알고 싶지 않은 우울감으로 자신을 내버려둔다.

 

‘그런 사람’ 그 한 영혼을 내게 붙이시고 나로 씨름하게 하실 때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리 하신다. 한꺼번에 서넛이 몰려 내 감정이 고조될 때면 나도 감당이 안 돼 안정제를 먹는 빈도수가 는다. 그러니 어쩌겠나? 이제 아는 것은 붙이시는 것도, 일정한 기간을 맡기시는 것도, 그러다 자연스럽게 떨어져나가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일정에 따른다. 그때마다 나는 나의 감정이입으로 주께 기도한다. 어쩌다 누구로 인해 눈물지을 때 울고 있는 내 자신이 이상할 정도일 때도 있다. 그러므로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22, 32).”

 

곧 오늘 내게 필요한 명철함은 주를 신뢰하는 것으로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감정에 충실한 일이다. 내가 알게 된 사실은 어찌 저로 인해 내가 내 감정이 아무렇지 않다면 기도가 나올까? 형식적으로 구할 수 있고 위하여 기도할 수 있겠으나, 그 기도의 결말은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정도다. 그렇게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주의 사랑은 아니다. 대신 십자가를 지심 같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나로 이 길을 가게 하실 때 나는 몽상가였다. 어떤 목회를 꿈꾸는 자였다. 나름은 낭만적인 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 나의 사치를 여지없이 뭉개고 주저앉히신 하나님을 사랑한다. 졸업 후 목사가 되고 그때 그 강의를 시작으로 사회로 나갈 수 있었더라면… 나도 어디 담임 목사로 가서 일선에서의 목회를 감당할 수 있었더라면… 이런 생각을 가끔 하는데, 그럼 지금처럼 저 아이, 누구의 어떤 우울과 슬픔이 내가 맡은 일의 전부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로 나는 어디가 자꾸 아픈 내 몸이 혹은 불안이 내가 맡아야 하는 사역이다. 이를 잘 다독이면서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몸을 이끌고 이렇듯 묵상글을 쓴다. 설교원고를 일주일 내내 작성하고, 누구와 통화를 우선하고, 누가 올 때 긴장하면서도 마주한다.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8-9).”

 

하여,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3:12-13).”

 

나에게 목회란 두신 자리에서 마주하게 하시는 이의 일로 같이 씨름하는 것이다. 어쩔 땐 혼자 있는 시간으로 힘에 겹다. 그러므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 3:9-11).” 이에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13).” 서로의 직분이 다를 뿐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같다. 아,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16).”

 

그러므로 오늘도 주께 고한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시 66:1-2).

 

그럴 수 없는 중에 그리 행함으로 귀하다.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9).

 

이 놀라운 사실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10-12).

 

내 곁의 남모를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주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이를 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6-17).

 

이에,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