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전봉석 2024. 5. 17. 04:19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딤전 5:22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시 68:19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가장 실질적인 관계는 가족에서 시작한다. 어려서 나이들 때까지 각각의 관계와 역할이 있다. 하여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32).” 특히 연약할 때에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 10:18).”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6-17).”

 

이러한 교육과 실천이 가정에서 먼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0-11).” 이는 서로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정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사회로 퍼뜨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몬 1:16).” 서로를 존중하고 위하되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니,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시 68:5-6).

 

하는 오늘 이 아침의 말씀에서 새삼 가정과 그 가족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된다. 어쩌다 ‘아픈 아이’나 그 심령이 상한 자를 마주할 때면 대부분이 가정의 붕괴와 가족 간의 반목이 심하여 이는 마치 공식 같다. 일찍이 어려서 그 부모의 공격적인 언행이나 무책임한 언사를 가지고 평생을 산다. 누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데 그의 무의식 속에 아버지에 대한 경계와 어려운 마음이 너무 커서 부정적인 호칭이 되었다. 이를 고백할 때 저는 자신이 미처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데 놀라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는 그 부모의 이별이 자신 탓으로 돌리기 일쑤고 어린 몸으로 그 짐을 홀로 지고 씨름하다 정신과적인 문제를 갖게 된다. 이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이는 우리가 서로의 짐을 대신 지는 것으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하는 우리의 사명을 되새기게 한다. 곧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이에 따라 우린 우리 곁의 한 영혼을 가족으로, 같이 하는 주의 자녀들로 위하는 게 옳다. 이를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아이와 출근 전 오전에 줌으로나마 성경공부를 하면서 저의 질문에 답하다 내가 주께 자복하는 경험을 자주한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친구와의 전화로 하는 성경공부에서도 내가 설명하다 나의 안목이 열리는 것을 느낀다. 곧 우리가 드릴 영적예배란 거룩한 제사로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딤전 5:4).” 그러므로 한 영혼을 대하는 데 있어 때로는 부모 된 마음으로 혹은 자녀된 심정으로 서로 섬기고 위하는 게 마땅하다.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 12:9).”

 

그렇게 우린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실제의 삶에서 우리 곁에 두신 가족과 교회와 사회에서 이웃하는 이들을 섬김으로 알게 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다는 일은 비록 과부가 되었어도, “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룻 4:14-15).”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데 있어 때로는 거치고 마음이 어려울 때도 있으나 주의 사랑으로 대함이라,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 5:10).” 그러므로 행여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13, 15).” 어떤 처지에서 그때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자신을 찾을 때는 주의할 것이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하신 말씀을 의지하며,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132:1-2).

 

이와 같은 기다림이 우리로 온유하게 한다. 실제 ‘가난하다’는 성경의 의미는 종말론적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어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 것을 이르시며 저로 ‘천국이 저의 것이라.’ 하셨다. 이때의 가난함은 우리로 온유한 자가 되게 한다. 온유함은 부드럽고 온순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당장 오늘 이 현실은 우리를 삼킬 듯이 달려들지만….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68:1-3).

 

하는 오늘 시편의 기도와 찬송이 길라잡이가 된다. 주께 아룀으로 당장의 성급한 판단을 미루고 주 앞에 온유할 수 있는 자로,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우리의 행위로나 어떤 노력의 결과로가 아니다.

 

일선 목회를 하고 있는 막내가 전화를 했다. 여러 교회에서 전임으로든지 파트로든지 사역을 감당한지 수십 년째이다. 그러는 동안 별별 사람과 사역자를 다 만나고 힘에 겨워하기도 한다. 나는 저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릴 적 아버지의 목회 현장에서 자식으로 보고 듣고 느꼈던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오늘의 나로서는 다소 특수한 경우라 그때마다 보내시는 이와 곁에 두시는 이로 씨름하다 언제 떠나고 또 새로 오고 하는 경우와 같아서… 앞서 고인물이나 흐르듯 흘러가는 물 같아도 다 그 사연은 저들의 됨됨이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맡은 자의 사명에 따라 더하시는 주의 마음으로였다.

 

그러니까 한 영혼을 사랑하는 일이란 내가 내 의지나 나의 경험으로 행함이 아니었다. 정작 죽은 자 같으나 살아야 할 사람이 있고, 살았다고 하나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자도 있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을까? 할 때 하나님이 임의로 막으시거나 맡기시는 경우를 본다. 어제 동생은 교회 안의 아무개 부장의 ‘이상 행동’에 대해 물었고 저의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교회 안에서 물의를 빚는 일에 대하여 말할 때, 참 희한하다 싶을 정도로 꼭 그런 사람들이 어딜 가나 한둘은 있다 싶었다. 이때 예수님은 단호하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2).” 곧 저들은 훼방자다.

 

오늘 바울도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 아닌 건 아닌 것이지 그걸 감싸고 어떻게든지 봉합하려고만 들면 더 곪아 곁의 영혼들도 상하게 한다. 썩은 것은 도려내야 한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1-23).”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모두를 사랑할 수는 없다. 모두가 만족하는 사랑도 없다. 자기중심적인 경우는 죄의 본질이라, 저마다 자신의 사랑과 그 생각으로 산다. 자기 흥에 겨워 사는 영혼을 두고는 어찌 감당이 안 된다. 저의 장단에 맞추어 모두가 들썩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보면 이상할 정도로 같다. 꼭 그런 사람이 뒤에서는 다른 말 한다. 앞뒤가 다른 사람은 어디나 있다. 스스로도 이를 알 수 없는 것은 앞도 뒤도 자신만 볼 수 없는 영역이어서이다. 실제 그 얼굴은 자신만 못 본다. 그럼 남의 눈에 비취는 모습을 주의하고 어떤 거울, 흔히 안 믿는 자들은 마음의 거울이라 하나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어서 날마다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보아야 한다. 주가 말씀하시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앞뒤가 다른 것은 내남없이 같으나 자신을 잘 아는 자는 자신에 대해 하는 말에 신중하다. 이를 경청할 수 있는 게 저의 인격이다. 뭐라 이르면 평가 받고 판단 받는 것으로 여겨 싸우자고 드는 자에게는 점점 그 곁에서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또는 스스로 오늘 자신의 관심과 그 행함으로 자신이 알 수 있다. 본디 사람은 마음이 가는 곳에 몸도 가는 법이어서, 친구를 보면 그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신만 두고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주장하는 자는 어리석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잠 14:18).” 그러니 알다가도 모를 것 같으나 실은 이보다 더 투명한 진실도 없다.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사 32:6-8).”

 

그러니 자신이 자신의 앞뒤를 보는 사람은 자신의 행실과 그 곁의 사람들의 말에 주의할 줄 안다. 백날 뭐라 해도 자신이 옳은 줄 아는 사람은 미련하여서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 그러므로 스스로 어리석고 미련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의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26:25).” 그리하여 나 역시 주의하는 일은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딤전 5:22).”

 

누가 어떻다, 하면 나 자신부터 살핀다. 두 사람의 굴뚝 청소부가 내려와 깨끗한 자가 더러운 자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먼저 씻는 이치와 같다.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딤전 5:25).” 그러할 때에,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68:6).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1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