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6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시 69:1-2
자족할 수 있는 마음은 없다.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자족하는 자 같으나 곁의 아무개를 볼 때 마음은 바뀐다. 이 땅에 살면서 부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든 든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자족을 명하고, 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경계하게 한다. 우린 늘 결핍 상태라, 에덴 이후의 삶에서는 필연적인 욕구가 되었다. 자신을 위하고 우선하는 것에서는 영락없다. 기껏 마음이 평안하다가도 어떤 찰나에 순식간이다.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며 산다.
이때 오늘 말씀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하신다. 실은 이것으로 우린 자주 넘어지고 자빠진다. 그런 가운데 약한 몸이 혹은 부족한 형편이 우리로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살게 하고, 그에 따른 기다림과 소망이 우릴 온유하게 한다. 결국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우리로 이 땅에 살면서 우리를 사로잡게 하신 것들로부터 오히려 평안을 구하고 이 어려움과 당혹스러움을 두고 기도하게 하신다. 누구는 평소 몸이 약해서 감기라도 오면 1-2주는 앓는다. 앓는 동안에도 저는 출근을 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감당한다. 그러느라 강한 약물을 복용하고 어려운 처지에서 이를 악문다. 나는 늘 저의 성실함을 높이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는 동의할 수 없다. 흔히 약함을 이겨내는 자들의 폐단은 자신보다 나은 자들이 자신보다 애쓰고 수고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혹은 자신을 옳게 여긴다.
이때,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말씀의 각도는 우리의 생각을 바로하고 시선을 교정한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1-2).” 흔히 있으면 있어서 감사하기 어렵도 없으면 없어서 감사하기 어렵다. 우린 늘 무엇을 두고 불평하는 게 몸에 뱄다. 몸에 밴 옛 생활에 대해 나는 이번 주 친구와 성경공부를 하며 자주 언급하게 되었다. 저는 투덜거리며 왜 말씀은 딱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묻기도 했다.
한동안 나 역시 그런 공식을 바란 적이 있다. 어떤 원리와 같이 명쾌한 답을 원하는 마음인데, 이는 우리가 교만해서였다. 내가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모순이고 이단이다. 마치 우리 몸의 신비도 다 알지 못하고, 지구의 여러 기이한 현상은 물론 우주의 감추어진 비밀도 알면 알수록 신비해하면서 하물며 이를 지으신 하나님을 우리가 규정할 수 있다? 그러니 그럼 애매한 가운데서 어찌 주를 알까? 하는 친구의 질문에 믿음으로라고 답하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어찌 그럴 수 있나 싶은데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이 놀랍고도 신기한 사실은 우리 안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나는 저에게 그렇듯 이해할 수 없고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고 믿을 수 없는 중에도 제자훈련을 하고, 새벽예배를 나가고, 쉬는 시간에는 밀린 숙제(성경공부)를 하듯 그것에 마음을 둔다. 곁의 누구 일에 신경 쓰고 저들을 위하는, 자신도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저 역시 그런 자신이 이상하긴 하다. 이에 따른 오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뒷받침한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딤전 6:1).” 특히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2).”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 13:11).”
이와 같이 우리가 서로 같이하며 그 마음을 거두지 않는 것은 ‘다른 교훈’의 폐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린 모두 ‘돌아온 탕자’이면서 ‘남이 있던 큰 아들’의 속성을 가졌다. 이에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5).” 그러할 때,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6).”
자족은 있는 그대로 감사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7-8).” 주신 상황 속에서 오늘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일, 그러할 때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9).” 실은 이것이 공식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스스로는 아니라고 해도 우린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 ‘한국 부자 보고서’를 보면 금융자산 규모가 10억 원인 경우를 부자로 정의하였다. 그 수는 약 35만 명이었다(2020년 조사).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또 생각하기를 총 자산이 70억 원 이상은 되어야 부자라고 생각한다고 응답했다. 그러니까 상위 1% 안에 드는 부자도 자신을 부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결과이다. 부란 상대적인 것이나, 부에 대한 욕구는 끝도 없다. 여기서 볼 때 부자들의 두 가지 위험성이 드러난다. 하나는 그 마음을 높여 가진 것이다. 많이 가졌으면서도 스스로를 다른 사람에 비하면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소망을 둘 수 없는 것에 끝임 없이 소망을 둔다는 점이다. 이 또한 더 가진 자와의 비교에서 늘 자신은 못 가진 것을 두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눅 18:25).” 그만큼 저들 마음에 만족함이란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구덩이 같아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 이는 가난도 그와 다르지 않아서 남을 올려다보며 스스로를 더 비하하기 일쑤다. 그런 가운데 오늘 말씀은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곧 오늘 이 마음은 선한 싸움으로 비유하고 있다.
즉 관념적으로 도를 닦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속성이 그러하다. 전에 어느 젊은 스님의 삶이 조명되며, 저들의 무소유를 높이 평가하다 다들 실망한 사실이 있다. 실은 저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이 엄청났고, 그의 스펙 또한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어려운 것에 실망하였다. 그런 이가 나와서 나눔을 강조하고 서민의 삶을 운운하는 일에 환멸을 느낀 것이다. 여느 정치인들의 입바른 소리만큼 역겨운 사건이었다. 선거철만 되면 시장을 돌고 어려운 국민들의 형편을 운운하면서 정작 저들은 자산가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산다. 그러다보니 일반인의 버스요금이나 파 한 단 값도 얼토당토않게 모른다.
이와 같이 억지스러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오늘 말씀은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딤전 6:13-14).” 오늘을 살면서 스스로 자족하는 삶이란 은사다. 은혜를 알 때 끙, 하고 앓는 소릴 내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감사가 나온다. 이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19).” 하시는 이 비밀의 말씀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를 앎으로 있으나 없으나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하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 안도한다. 우리가 믿는 믿음이란 믿을 수 없고 믿기지 않는 일에 스스로도 왜 믿게 하여 주시는지 알 수 없음에 감사할 뿐이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 1:7).”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믿는다는 것, 믿음으로 오늘도 이 길 위에서 산다는 것,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전 6:20-21).” 하고 디모데에게 전하는 이 말씀을 오늘 나의 것으로 되새길 수 있다.
하여,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시 69:1-2).
현실은 그러하고 우릴 어렵게 하나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 이를 알면서 나는 누구와 성경공부나 말씀을 나누는 일에서 내가 얻는 게 더 많다. 저의 질문에 답을 하다 내가 가지고 풀지 못했던 비밀의 답을 찾게 된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딛 3:9).” 내가 그러했던 것을 알게 되고 인정하면서,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10).” 저들은 말로 어찌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상대가 아님을 안다.
이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5-6).
나의 기도는 점점 단순하고 그 행동반경도 마치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이게 되면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9, 14).
주께 아뢰고 또 구하는 것,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17, 29).
그러할 때에,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3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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