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전봉석 2024. 5. 19. 04:39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7-8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시 70:1-3

 

 

5월이 오면 새삼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민중가요도 다시 들어보면서 분단의 역사와 군사독재시절의 뼈아픈 과거를 되새겨도 본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그때마다 그 시대 속에서 항거하고 투쟁하던 사람들의 아우성을 들어보기도 한다. 주어진 삶 가운데 어느 역사의 시점을 지나면서 겪어야 하는 저마다의 사정과 그 현실 속에서의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때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서 싸웠던 이들이 있었다.

 

오늘 본문의 첫 구절에서 나는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그리하였던 당당함을 눈여겨보게 된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하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1). 주님으로 발견하게 된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주전 64년 로마의 대화재로 인하여 당시 황제 네로(54-68)는 가혹한 박해와 핍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무참히 짓밟았고, 이는 역설적이게도 복음이 사방으로 퍼져가는 엄청난 역사의 발판이 되었다.

 

이때에 바울은 두 번째로 감옥에 갇히고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바울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려 옥에 갇혀 저는 더욱 더 자신을 인식하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옥중서신을 쓰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1:2).”

 

이는 모든 시대마다 그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서 믿음을 지켰던 이들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그 어느 때보다 저들은 결연하였다. 예수님은 그 당시 모든 상황을 아시고,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하시며 이와 같은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셨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 21:13).”

 

오늘을 살면서 우리의 각오와 그 심정은 어떠한지?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안일하고 나태한 시절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전쟁도 피하고 모진 가난의 시절도 벗어난 가운데 우리는 어쩌면 가장 안이하고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가운데서 우린 우리의 스승과 혹은 믿음으로 낳은 자식과 같이 섬기는 이가 있는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바울과 디모데를 볼 때면 특히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새삼 추수할 것이 없는 것 같아 두려움이 앞서기도 한다. 아버지 부재의 가정과 스승의 부재 시대를 살고 있는 현실의 교육현장에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그저 사느라 사는 데 급급하고 자기 가정조차 올바로 지키지 못하면서,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하여 우린 얼마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몬 1:10).”

 

어쩌면 우린 언제부턴가 자신만 보고 사는 근시안적인 삶으로 그 신앙을 고착시켜왔는지도 모른다. 교회도 이제는 자신이 선택하듯 수평이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그 교회에 뼈를 묻을 각오로 섬기는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어떤 이는 문화교류나 탐방일지를 기록하듯 자신이 선호하는 교회를 찾아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하는 게 부지기수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3-5).” 하며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한 저의 마음을 드러낸다.

 

곧 봄철의 나무는 한 겨울을 견뎌온 당당함으로 더욱 그 푸름을 뽐낸다. 죽은 듯 쩍쩍 갈라졌던 등껍질을 밀어내고 줄기마다 새로운 가지를 뻗어내고, 뻗은 가지 위로는 눈이 부시게 푸른 낙엽들이 한껏 힘을 주고 돋아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롬 1:9-10).”

 

우린 단지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로 그치지 않는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늘 기도와 헌금으로 멀리서나마 그 마음이 굳건한 이의 마음으로 우리 교회는 오늘도 건재하다. 비록 여기에 모이는 성도는 적으나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주가 주시는 마음으로 섬기는 손길을 따라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4-25).”

 

나는 저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며 교회를 지킨다. 더러는 누군지 모르는 이의 손길과 그 마음으로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고후 9:14).” 어느 훗날 우리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주의 영광을 찬송할 때에 비로소 서로 반가움으로 주께 경배할 터인데,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8).” 그리하여,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5월이 되면 새삼스럽기는 하나 나 역시 87학번의 시대를 살면서 겪었으며 보았던 분열과 폭압의 역사를 되새기며 그때도 알 수 없던 답답함과 허기진 마음이 오늘도 여전하지 않은가? 되새겨보기도 하면서… 부디 이제 거짓 없는 믿음으로 한 영혼을, 이 교회를, 맡기신 나의 연약함으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당시 이스라엘도 남북이 갈라졌고, 저들의 전쟁과 반목은 골이 깊어 각각의 멸망의 길로 이르러 로마의 압제 가운데서도 말씀은 말씀으로 이루어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3, 14).”

 

우리가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구구한 역사는 유유히 흘러가듯 우리 인생은 어디쯤 황혼을 맞으면서 비로소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 15:2).” 어릴 적 늘 교회를 지키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뿌리를 내렸던 이들이 있었다. 저들의 뿌리가 오늘에 굳건한 가지로 뻗어나서 누구는 선교사로 목사로 어디 신학교 교수로 그 후대의 믿음을 지켜가고 있다. 이에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3-5).” 이는,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6).” 우리가 살면서 이내 맺어서 거둬야할 열매는,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시 34:11).

 

하여,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10).” 이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하심이 오늘 우리의 사명이 아니겠나? 그러는 데 있어 우린 얼마나 영적으로 권위를 잃지 않고 살고 있는지? 아이 같은 어른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른 없는 아이들의 시대는 훗날 어떤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인지…….

 

가끔은 긴 한숨과 함께 오늘의 기이한 현상을 본다. 아이가 우상인 것은 차치하고 그 역시 선호와 선택의 문제로 아비 없이 아이를 가지고 정자나 난자를 임의로 얼렸다 녹였다 하면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채, 아이를 갖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에 만족하며 검은 머리의 엄마는 노란 머리의 아이를 고도의 장난감처럼 소유하고 그 기호에 따라 키우며 이를 자랑스러워한다. 정작 그 아이의 정체성에 대하여는 한 번쯤 고려하고 있기는 하는지? 입양을 기다리며 버려진 아이들이 수두룩한 가운데서 아이들은 물건 값처럼 치러지며 어디론지 팔리는데, 누구는 비혼주의로 아이만을 잉태하여 자신의 모성을 만끽한다.

 

누가 괴물인지? 그 또한 법적으로 허용을 하네 마네 하면서도 버젓이 방송은 저의 삶을 소개하고, 사람의 생명 또한 애완동물을 선택하여 고르듯 얼린 난자를 녹여 누군가의 얼린 정자로 결합시켜 사람 모양의 또 다른 사람을 만들어낸다. 아, 그런 가운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7-8).”

 

5월은 그래서도 잔인한 달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9-10).” 나는 말씀 앞에서 엉뚱한 상황을 돌아보기도 하면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11).” 하심 앞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부디,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3-14).”

 

정작 우리가 잃어버리는 아름다움은 무엇인지?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70:1).

 

어제는 딸애와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이마저 각자의 기호와 선택의 문제로 형편에 따라 취하고 말고 하는 대상이 되었다는데서 두려움을 토로했다. 그 나이쯤 되면서 더러 곁의 누군가는 결혼을 원하지 않으나 아이는 원한다며, 마치 어떤 애완동물을 키울까? 하고 사치스런 고민을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전쟁을 겪는 끔찍한 현실도 아니고 찌든 가난으로 먹고 살기에 급급한 시대도 아니면서, 우린 너무 우리의 영혼을 아무렇지 않게 방기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할 때 오늘의 시편으로 기도한다.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들이

뒤로 물러가 수모를 당하게 하소서

아하, 아하 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뒤로 물러가게 하소서

(2-3).

 

어쩌면 나의 우려나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 상실의 시대를 토로하는 것이 ‘꼰대’ 같을지라도,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4).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