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전봉석 2024. 5. 28. 04:07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히 2:1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 79:9

 

 

우리가 들은 것에 유념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굳게 서서 탁류 같은 세상으로 떠내려가지 않기 위함이다. 점점 더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단절을 조장하고 모든 게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더러는 그 외로움을 비인격적인 관계에 쏟음으로 사람과의 소통을 대신한다. 어쩌면 우린 이미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탈하여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다. 이때 우리의 가는 길은 저마다의 곁눈질로 서로 다른 길을 선호한다. 오늘 첫 구절의 말씀을 나는 그리 읽고 이에 따른 주의를 듣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세상은 온통 우상숭배로 가득하여,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1, 10).”

 

그러면서 버젓이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여긴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올바른 정체성을 잃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함으로 광야를 돌아야 했던 민족처럼 우리 개개인의 시간은 너무 먼 길을 광야에서 돈다. 이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하는 중요한 복음의 명제를 잊어버리고 산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

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시 78:22-25).

 

늘 깨닫는 것은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우린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전 15:2).” 살면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 주의 구원을 삶 가운데서 경험하게 되는 일이 매순간에 일어난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나는 그리 여겨 옳다 하였다는데 주가 어떤 형태로든지 막으시는 것을 느낀다. 후에 돌아보면 물질적인 손해로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여러 일들 가운데서도 주가 함께 하셨음을 느낀다.

 

이에,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10).” 우리로 진리를 사랑하게 하심인데, 우리 곁의 불의한 일들과 사람들은 그러한 경우 우리 훈련하는 조교와 같다. 신앙은 연마이고 그 믿음은 연단을 통하여 자라가는 것이어서 그에 따른 저들의 역할은 우리로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게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저들로 우리가 길을 벗어날 수 있고, 그리 하고자 저들은 혈안이 되어 우릴 옥죄는 것인데 우린 오히려 그러한 어려움을 통하여 주 안에서 더욱 강건하여진다.

 

아는 것과 사는 일은 별개다. 들은 것은 아는 것이나 삼가는 것은 사는 일이다. 아는 것이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앎으로 우리가 사는 데서 구원은 이루어져 간다. 나는 자주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저가 무엇을 이해하기 어렵다, 모르겠다고 할 때마다 아는 정도에서 살다보면 알게 된다고 말해준다. 실제 우리가 아는 것으로 사는 것이나 사는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머리로 알려고 할 때 이런저런 비판이 따르거나 남을 견주어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그러므로 구할 것을 알고 받은 것으로 살 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 2:18).” 결국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아는 것으로 족한 게 아니어서,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지! 가끔 나는 이처럼 묵상글을 쓰면서 혹은 누구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한 말에 대하여 과연 나는 그리 살고 있는지? 하고 묻다 어떤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3).”

 

지키고 지켜 어딜 가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말씀으로 사는 삶이어서,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 4:2).” 우린 영원한 초장으로 길을 떠나는 누 떼와 같이 묵묵히 앞선 자의 신앙의 길을 따라 간다. 그러할 때 우린 듣는다. 말씀은 선포이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전 8:6-7).”

 

곧 우리에게 두신 이 놀라운 은혜 앞에 자중한다. 분명 어느 시대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소수의 ‘남은 자들’ 혹은 ‘피한 자들’을 숨겨두셨다.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다만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게 하여 우리가 수치를 면하게 하라 하리라(사 4:1).”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하고 준비할 때면 그게 나인 것을 확신한다. 왜 나 같은 자로 그리 삼으시고 그와 같은 긍휼을 베푸시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요즘은 이사야서를 준비하면서, 2:6-4:1에서 ‘시온의 남은 자들’에 대한 예언을 읽으며 놀란다.

 

저마다 다 하나님을 배교하고 타락한 백성들 가운데서 이에 ‘피한 자들’ 곧 하나님께서 따로 ‘남기신 자들’을 거룩하게 회복시키심을 알게 된다. 이는 오늘 날에도 마찬가지로 모두가 어떠하든지, 우리로 왜 이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시는지를 알게 된다. 부족하나 내가 누구와 통화로든지 혹은 짧은 만남으로 주를 알게 할 때, 나의 지식 너머에서 주가 말하게 하심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사 4:2-4).”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한참을 머물며 나의 날들을 돌아보아 그 증거를 확신하게 된다. 그릇 행하여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나로 그 증거가 되게 하심으로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주의 긍휼하심과 은총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있을 수 없다.

 

결국 보면 모든 게 지난 이야기 같으나 현재형이다. 신앙과 믿음 사이에는 과거형이 없다. 그랬었지? 하고 회상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증거로 오늘을 산다. 그러므로 여전히 그러하심을 안다. 주가 오늘도 나로 이 시간 주 앞에 앉히시고, 어제도 이런저런 일들 가운데 허튼 결정을 내리지 못하도록 이리저리 막으심으로, 나의 사소함으로 나는 주의 살아계심을 삶으로 느낀다. 곧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7-28).”

 

또한,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유 1:15-16).”

 

이로써 나는 이러한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주의 복음을 선포한다. 저를 설득하려 함이 아니라, 말씀을 전할 뿐이다. 끝내 듣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로서 더는 어쩔 수 없다. 누구를 대하는 일에 있어서도 세상은 여러 형태로 좋은 게 좋은 것처럼 좋을 때나 좋은 사이로 살기를 바라지만 아닌 것에 대하여는 하나님은 거기까지, 딱 그 선에서 끊으시는 것을 느낀다. 더러는 내가 미련이 남아 마음이 어려운데 주님은 그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이때마다 훼방자요 이탈자인 사탄의 유혹은 교묘하다. 이에 기도하기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 79:9).

 

자칫,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하물며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히 2:2, 3-4).”

 

우리의 완고한 마음은 길가 밭과 같아서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막 4:15).” 때로는 안 믿던 친구가 뒤늦게 성경을 알아 말씀을 사모하며 자신을 돌아보려는 데서 증거하는 말씀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너무 오래도록 익숙해져 몸에 밴 사역자나 모태신앙의 아무개에게 증거하는 일이 더 난감할 때도 있다. 다 안다, 하고 듣는 이들 앞에서는 어떤 권면도 혹은 위로도 그 힘이 없다. 상대적으로 자신은 잘 모른다고 하며 처음 들으며 신기하게 여겨 더 알고자 하는 이에게는 신명이 난다. 우리 몸에 밴 습관으로 우리의 믿음은 이론과 실제가 나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이에 오늘 말씀에 따라,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주가 보이신 이와 같은 구원의 길을 따라 우린 그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11).” 은혜로 산다. 이에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13).” 더러는 다만 송구하나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18).” 오늘 우리의 이 모든 상황을 주가 더 잘 아신다.

 

이에,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나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79:4, 9).

 

이는 주의 이름을 위한 것이니,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데서 안심하고 산다. 믿음과 은혜로 말이다. 하여,

 

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11-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