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전봉석 2024. 6. 12. 04:11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4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시 94:17

 

 

내 안의 욕심이 나로 어렵게 한다. 어떤 어려움이 상대적으로 나의 마음을 짓누른다. 예전에는 어떠했는데, 하는 생각에서부터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떤데 나는 이게 뭔가?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이에 오늘 말씀은 일갈하시며,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하고 되물으신다(약 4:1). 지체의 정욕으로 좇아나는 것, 내 안의 갈등과 분냄은 물론 누구를 향한 어떤 마음도 다를 게 없다. 내재된 욕심은 더 나은 무엇을 추구하다 나를 어지럽히고 내 영혼을 쥐고 흔든다.

 

이는 탐심으로 인한 것이다. 성경은 이를 물리치라 이르신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이를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체의 욕심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베드로는 우리가 나그네인 것을 강조하며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인생은 그저 왔다 사라지는 안개나 연기 같아서 셈할 가치도 없는 것을 오늘 본문은 시인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런데도 욕심으로 그 마음을 지배당하면 스스로는 우울증환자가 되거나 아귀다툼을 하듯 냉정한 인간이 된다. 이를 본문은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2-3).”

 

주께 구하는 것으로 해결될 일인데,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욕망이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이다. 그때 평소와 다른 시선으로 보고 느낀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갑자기 평소와 달리 느껴지는 것, 어떤 감정 또는 일에 대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또 다른 경계에 욕망이 있다. 이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우리 안의 어떤 감정, 혹은 그 변화에 따른 어떤 행동으로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은 원하는 것을 보면 된다.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따라가면 안다. 어울리고 같이 있는 자리가 그 상태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므로 최선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4:5).” 이는 하나님의 원리로,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6).”

 

내가 높이면 주가 낮추시고 내가 낮아지면 주가 높이시는 원리 가운데서 먼저는 내 안에 이는 갈등, 그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7).” 아침마다 이처럼 억지로라도 말씀 앞에 앉히는 이유이다. 말씀으로 내 자신에게 선포하지 않으면 내 안의 갈등은 나에게 속닥거리며 칭얼대고 보챈다.

그러므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주님, 하고 나의 속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으로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곧 전에는 내가 알아서 사람을 찾고 저들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며, 나의 꿈을 좇아 꿈꿀 권리를 가지고 살았다. 그 기준은 늘 누구처럼 되는 것이고 누구와 같은 신분으로 사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저들의 행복도 만족도 허상이었고,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음을 안다.

 

기도의 동기와 목적이 중요하였다. 오늘 본문은 이를 일깨우며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이에 주님은 본을 보여 기도하시길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2).” 이를 시인은,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시 145:18).

 

하고 찬미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의 바람은 기도에 있어 ‘먼저와 나중’이 분명하였고, ‘이유와 목적’도 확실하였다. 그것을 왜 구하고 있는지, 나의 기도를 돌아보게 한다. 이를 신앙의 정조로 비유하여 간음하는 여인으로 우리의 그릇된 구함을 지적하면서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이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시는 주의 음성이 들린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 오늘 나에게 더하신 이 한 날에 이 몸으로 이 환경 속에서 주를 바라는 일, 때로는 나의 생각 같지 않아 마음이 어렵고 누구와 견주어 상대적으로 주눅이 들어 우울이 찾아오곤 한다지만, 오늘 말씀의 해법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마음도 행실도 성결할 수 있다. 이에 그러기 어려운 나의 완악함을 인정하며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9).” 그러할 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주가 더하시는 위로가 아니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위안을 삼을 수 없는 일이어서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곧 이는 내가 하나님보다 나를, 나의 욕망을, 세상의 정욕을 사랑하기 때문이어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세상을 살면서 상대적으로 세상과 비교하며 의미를 찾기 마련인데, 그렇게 세상과 벗이 될 때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를 “간음한 여인”으로 빗대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세상도 사랑하는 일을 두고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묻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나는 이 말씀 앞에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순간순간 일어나는 어떤 갈등이 또는 외로운 감정이 불쑥, 나의 처지나 어떤 상황을 탓하게 한다. 돌아보며 이게 다 저들 때문이라며 내 곁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총구를 겨누듯 원망한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시기하기까지 우리에게 향한 마음이시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5).” 이 놀라운 증거로 나의 나 됨이 새롭다. 왜 그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시는지….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즉,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6-7).”

 

주가 나를 부르셨고 백성삼아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가 나를 어찌 사랑하시는가를 새삼 귀히 여기게 된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 31:3).” 그러므로 내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의 순복이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인생 그리 넉넉하지 않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으나 금세 내 나이 중년이 훌쩍 지났다.

 

날이 좋아서 그런가? 요즘 부쩍 낚시도 가고 싶고 어디 휘익, 떠나고도 싶은데 하나님은 나를 묶어놓으신 것처럼 때론 이해가 안 된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순간 훅, 하고 어떤 불안이 엄습하면 속수무책이라… 마음으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이를 억지하고 자중하게 하심이 주께 있었다. 상대적으로 마음은 위축되고 우울하기까지 할 때도 있지만 그것으로 나는 이처럼 같은 시간대에 같은 동선을 따라 가장 단조로우면서 확실한 하루를 보낸다. 이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저녁 시간을 포기한다. 밤늦게까지 즐기던 모든 것을 버렸다.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마나 한 소리, 객쩍은 농담이나 안부에는 흥미를 잃었다. 같이 어울려 즐기던 것도 시들해졌다. 어떤 이의 전화나 연락은 의도적으로 피한다.

 

이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5-16).”

 

나의 날들이 그러하였음을 알고,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17).” 이제는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일과 그의 쓰심에 감사하면서….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섣불리 아차, 하다 한순간이다. 언제 내가 여기까지 흘러왔는지, 그런 가운데서도 주가 나나와 함께 하셨음을 인정하면서…….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94:11).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을 피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12-13).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14).

 

나는 확신하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17).

 

오늘의 내가 나일 수 있어 주께 쓰임을 받게 하셨으니,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18-19).

 

이에,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