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전봉석 2024. 6. 11. 03:5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약 3:13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시 93:1

 

 

어떤 어려움이 우리로 기도하게 한다.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실 때 그것으로 우선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누가 기도부탁을 하면서 이런저런 그간의 사정을 말하는데,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시려고 오늘의 징계도 감안하신다.

 

더하신 은혜에 따라 맡기신 바, 그에 따른 것을 요구하신다. 오늘 1절을 그리 읽을 때 두렵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그러니 거의 평생을 선생으로 혹은 목사로 살면서 나는 싫든 좋든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뭐라 훈계하며 살았을 터, 나의 삶은 나의 말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아 마음이 어려워지고는 한다. 곧 그 지위와 위치를 이용하여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막 12:40).” 그러하지는 않았는지?

 

글방 선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 부모와 상담할 때, 그때도 분명히 말 못할 어려움으로 속을 앓고 있는 아이도 있었을 텐데… 나는 외면하였고 저의 짐을 나눠지려 하지 않았다. 문득문득 기억나는 몇몇의 아이의 경우 결국 공황을 앓거나 거식증에 걸린 아이도 있었다. 그때는 그런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헤아릴 수 없었고 ‘그런 문제’로 돌려보내거나 부모에게 넘겨서 내 곁을 같이 나누는 데 꺼려하였다. 글방에서 교회로 한 영혼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감정과잉이입으로 내가 더 힘에 겨워 헉헉거리는 연약한 자가 되었고… 이를 어제 누구와 통화하면서 저의 지적에 나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 그 한 사람에게 곁을 주며 같이 가는 길이라니! 이런저런 누구의 사연을 들으며 나는 서너 개의 기도제목을 적어두었고, 겪고 있는 지금의 어려움을 어찌 위로하고 주의 능력을 더해야 할지, 여러 생각이 많았다. 그러니 말씀이 나를 불러 세우시는 것 같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 2:21).”

 

정작 남의 일을 두고는 이런저런 평가를 하면서 나 자신은 어떠한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3-18).” 이게 나는 아닐는지.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4-5).”

 

어제는 공교롭게도 두 개의 약속이 무산되었다. 저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시간을 바꾸거나 연락도 없는 것에 화가 났다. 나는 저와의 시간을 염두에 두고 미리 30분 전 혹은 한 시간 전에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시간이 지나도 연락조차 없을 때는 이게 뭐하자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럼 내 안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는 판단과 비난이 서서히 들어찬다. 그런 나에게 말씀은 정조준 하여 선포된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7-38).”

 

하나님 섭리 앞에 서면 앞서는 생각과 마음과 그에 따른 말의 씨는 잘못 뿌려지기 일쑤다. 오늘 본문에서 이 부분을 길게 진술하고 있는데,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이는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3).” 마치 이것은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4-5).” 그런 것과 같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6).”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서면 두려움이 먼저 생긴다. 내 이야기로 내가 얼마나 함부로 생각하고 속으로 판단하다 나도 모르게 툭, 하고 튀어나오면 거침없이 모든 것을 쓸어내리는 창수와 같은지…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 17:27-28).” 내 스스로는 길들일 수 없는 것이어서,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7-8).”

 

이에 지혜자는 거듭 경고한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잠 21:23, 29:20).”

 

모두가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그러므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말은 마음에 담겼고, 표현은 시선에 담겼다. 무엇을 품고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에 따라 말의 격은 달라진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말은 습관이고 습관은 인격이다. 한 아이가 있어 말끝마다 욕을 하고 부정적인 언어를 쓰자, 하루는 아이엄마가 아이를 뒤뜰로 데려갔다. 그리고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묘목을 뽑아보게 하고, 곁에 몇 년 된 작은 나무를 뽑아보게 하였다. 흙이 얕아 아직 뿌리가 깊지 않은 묘목은 금세 뽑혔지만 벌써 몇 년 자란 나무는 아이 힘으로는 뽑을 수 없었다. 아이엄마는 아이 옆에 서서 우리의 말도 이와 같아서 습관은 몸에 배면 그것이 인격이 되고 운명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4:3, 18:21).”

 

그러면 선한 말은 천국에 두고 사는 마음의 언어로 바뀐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 3:9-11).”

 

말이 무서운 것은 말로 나왔을 때 현실은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든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잠 11:22).” 그러므로 우린 얼마나 자신까지도 속이며 토해내는 게 말인지를 알아야 한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눅 11:44).” 같은 번지르르한데 그 속은 무덤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시 84:5-6).

 

상황이 어떠해도, 마음이 어떻다 해도,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이는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하여 오늘 말씀도 이에 따른 것으로,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2-13).”

 

내 속의 온갖 더러운 생각과 판단과 남을 탓하는 것들은,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15-16).”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결론으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17-18).”

 

오직 ‘성결과 화평과 관용과 양순과 긍휼과 선한 열매’로 내 마음이 채워지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93:1).

 

하여 주를 의지하며,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 13:3).” 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오늘도 이와 같은 말씀을 앞에 두고 나의 입술을 제어할 수 있기를,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1-13).” 그러할 때에,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141:3, 9).

 

이는,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93:2).

 

하여,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