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전봉석 2024. 6. 15. 04:41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 2:25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 97:12

 

 

모든 게 감사할 것뿐인데 늘 내 마음은 불만으로 앞선다. 족한 줄 알지 못할 때 마음은 저 혼자 요동치며 흔들린다. 그러면서도 누구와 성경공부를 하거나 말씀을 나눌 때 그 마음으로 찌른다. 전하는 나의 마음이 찔릴 때 상대는 마치 다 알고 있는 듯 그러한 나의 마음까지도 흡수한다. 베드로의 심정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저를 아는 마음으로 오늘의 설교가 더 크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하는 데서 저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더욱 간절하게 이를 바라지 않을까? 그리하여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 하는 부분에서는 자신을 앞에 두고 그리 선포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앙의 하나 더하기 둘은 하나다. 거듭난 자로 살아야 하는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계단을 오르듯 성장한다. 하나 더하기 둘이 셋이나 넷이 될 수 없는 것은, 신앙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주님은 이르시길,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농부에게 있어 밭이 아무리 넓거나 좁거나 한 번에 쟁기 한 번씩 나아갈 뿐이다. 우리가 인자를 맛보았거늘 다른 것으로 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 다른 데 눈을 돌린 듯 만족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36:7, 63:3).

 

그러므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곧 이 땅에서 추구하는 모든 소원은 궁극적으로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무너질 장막을 위해 쌓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있다. 저 본향을 향해 간다. 곧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하여 우리 신앙의 하나 더하기 둘은 하나씩, 하나씩 주신 한 날의 삶으로 충실한 일이다. 이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3-14).”

 

살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날 동안에는 성장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고 밭은 농부의 쟁이질에 따라 확장된다. 그렇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여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데서 안도한다. 가끔은 나 혼자 마음이 어려워 누구와 비교하고 어떤 일을 두고 혼자 비판하느라 마음이 상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문득 누구의 기도부탁이나 같이 어떤 성경을 나누다 불현듯 깨닫는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것이 믿는 우리에게는 안전한 요새 같고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인데 안 믿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어서, 오늘 베드로는 간절하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오늘 이 자리,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그 일, 어떤 상황 속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 6:1-2).”

 

친구와 대화하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나는 더러 뜨거운 은혜를 맛본다. 남들에게 말하기 어려운, 그러나 친구와는 함께 그 어리석었던 자리에서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던 시절을 고백하다 울컥, 하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다. 나의 죄가 너무 커서 그 죄로 인하여 주 앞에 부끄러운 것뿐데,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86:13).

 

그러므로,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90:14).

 

더는 사하심을 받기 어려울 것 같이 마음이 무겁게 느껴지는 죄에 대하여도 더는 이를 짊어지고 씨름하지 않는다. 나는 친구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려주며 나와 함께 이 은혜의 자리에서 주를 찬송하기를 권한다. 늘 건조하며 감사하나 크게 감사할 게 없어 그러한 자신을 놀라워하는 저에게 나는 울먹이며 말하였다. 우리가 무시하고 함부로 여기며 살았던 하나님의 존귀하심 앞에서 이제와 용서를 구하는 것조차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인데,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108:4, 109:21).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나의 설명을 들으며 친구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래, 우리가 그랬지… 하며 답을 흐렸다. 나는 저의 고백이 주 앞에서 뼈저리게 아프고 통회하는 심정이 되어 주를 바라는 데 있어 새로운 발판이 되길 기도하였다. 우리 신앙의 하나 더하기 둘은 하나다. 감사할 것뿐이다. 다른 군더더기 같은 변명도 헛된 바람도 소용이 없다. 이를 오늘 베드로는 온 힘을 모아 한 문장으로 이르기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3).”

 

이는 곧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9-10).”

 

그러니 돌아보면 내가 나를 얼마나 의지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갈구하며 구걸하듯 살아왔는지… 그때 그 시절 내가 사랑하였던 사람과 문학과 문화와 어떤 분위기 따위의 것으로 하나님을 기롱하여 우스갯소리를 서슴지 않고 살았었는지. 당시 베드로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막 14:27).” 하실 때,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29).” 스스로를 장담하였던 그가 닭 울기 전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하여 저주하였던 일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6-8).”

 

오늘에서 나에게 보배인 것을 예전에는 어찌 그리 함부로 멀리하거나 부인하며 살고 있었는지…. 이제 와 바라는 한 가지,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귀함으로, 나의 남은 생은 주의 성전에서 주의 말씀으로만 충만하기를.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22:5).

 

그러할 때,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사 50:7).” 때론 내 안의 부끄러움이 수치심을 불러일으켜 나를 쥐고 흔들려고 하나,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28).” 그것으로 나는 나를 가장 많이, 잘 아는 친구 앞에서 복음을 전하다 울컥, 우리가 받은 은혜를 되새긴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이 놀라운 사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 더는 주를 멀리하는 자리로 떨어지지 않기를, 행여 다른 무엇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대신하려 들지 않기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 6:9-10).”

 

나는 이로써 나를 인정한다. 부득불 자랑할 것은 나의 추하였던 날들과 허물과 실수뿐이다. 그리하여 죽었던 나를 살리신 예수의 그 은혜로 오늘을 살면서 주를 인정하는 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5-47).” 다시 또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생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그때 우리가 얼마나 큰 죄악 중에 살고 있었는지, 나는 친구에게 우리의 허물을 들추어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기를 바랐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이에 베드로는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6-17).” 이는 모두 주를 존귀히 여기는 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 그러므로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25).” 더는 다시 그 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 주께 그리 구하고 간구한다.

 

이에,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97:1, 10-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