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3 주일
이사야 6장
거룩한 씨
사 6: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사 6: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사 6: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들어가는 말
우리는 신성한 성품 곧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거룩한 씨’를 가졌다. 그런데 우리 안의 ‘쓴 뿌리’가 이를 가로막는다. 오늘 본문은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3).” 하고 우리의 굳어진 영혼을 깨운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하여 우리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
이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으로 성령의 열매라 하여,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이를 위해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하신다.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히 12:15-16).”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실정이다.
우리의 <쓴 뿌리가 무엇일까?>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 이렇게 되는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곧 그것으로 우린 우리 안의 쓴 뿌리와 뒤엉켜 산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분명 출애굽한 데는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8).” 날마다 우리 안의 이 쓴 뿌리들을 거둬내야 했다. 그러기에 우리 힘이 모자라고 그 수고가 힘에 겨운 것을 아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주가 부르신다. 부르심에 응하면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다 이긴 싸움인데 우리는 <쓴 뿌리>로 어쩌지 못한다.
성경의 답은 하나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즉 우리 힘(육신)과 뜻(혼, 생각)과 마음(영혼)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할 때,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린 승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처음 사람 아담에게 부으셨던 생기(창 2:7)를 오늘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고 바울은 강조하는데도 우리는 듣지 않는다.
<쓴 뿌리>는 육신의 일이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이 <쓴 뿌리>를 제거해야 ‘영적인 눈이 열린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곧 우리 마음, 우리 영혼이 청결하기 위해서는 억누르는 염려와 근심, 온갖 스트레스와 짜증, 갈등, 화, 잘난 체, 이기적인 마음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럴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 때, 이 땅의 모든 것이 구차하다. 사느라 다들 애지중지해 하는 돈과 명예와 남들의 이목과 자기만족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오늘 우리의 문제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 1:8).” 즉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7).”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이에 따라 오늘 우리 안에 <거룩한 씨>를 두셨음을 알리신다.
이를 끝내 외면하고 살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3-44).” 결국 우리 안의 <쓴 뿌리>로 우리는 이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서 참혹한 결과로 슬피 울며 이를 갉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 오늘도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본문이해
1. 영접과 사명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1-4).”
오늘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본다. 그때에 이사야는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자’임을 깨닫는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5).” 이를 역설적으로 되새기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을 때가 가장 영광스럽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입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 2:21).”
1) 개인적인 체험이 따른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1-3).”
웃시야 왕은 유다의 열 번째 왕이다(주전 790-739년). 저는 스가랴 선지자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나라는 형통하였다. 나라가 강성하여지자 교만하여, 성전에서 제사장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직접 분향하다 나병환자가 되었다(대하 26:5, 16, 19, 21). 이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두려우심을 느꼈다. 두려워할 줄 알 때 하나님을 경외한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환상을 본다. 이사야는 두려운 마음으로 고한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2) 두려움과 회개는 회심과 용서로 이어진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 6:4-7).”
이사야는 천사들이 영광의 주를 모시고 선 것을 본다. ‘스랍들’은 천사들이다. ‘그룹’과 ‘스랍’은 천사군단이다. 저들이 외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면서 스랍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다른 두 날개로 발을 가린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들의 겸손을 나타낸다. 저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부족한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2. 거룩한 씨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 6:13).”
우리 안에 <거룩한 씨>를 두셨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이를 알지 못할 때 <쓴 뿌리>에 의해 세상으로 향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8).” 우리의 ‘영적 어두움’이 <쓴 뿌리>다. 성령을 구해야 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하여 주의 긍휼하심으로 산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 이때 <거룩한 씨>는 <남은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세상이 전적으로 부패했다 해도, 남겨 놓으신 <십분의 일>마저 황폐해졌다 해도, 구주를 영접할 때 자기 안의 <쓴 뿌리>를 제거하길 원하고, 주가 도우신다.
1) 부르심과 보내심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나를 보내소서’ 하고 우리는 나선다. 죽어도 싫다고 하던 나 자신이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수행함은 ‘악한 세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보내심에 순복하는 일이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미움 받을 용기’가 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할 때, 주의 권능이 우리로 맛보지 못한 기쁨과 평안과 용기를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실 자’에게 불가항력적으로 은혜를 주신다. ‘버려두신 자’에게 은혜를 주지 않으신다. 우리는 모두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다.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없다.
회개 없는 회심은 공허하다. 회개란 자신의 모든 의를 포기한다. 우리의 부르심과 보내심은 별개다. 주를 따르는 허다한 무리가 있었다. 애굽에서 나온 수많은 백성들이 있었듯이, 성도이나 누구는 끝내 애굽에서 죽었고, 누구는 광야에서 죽었다. 그 수는 엄청나다. 애굽에서 걸어나와 가나안에까지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뿐이었다. <거룩한 씨> 이 그루터기는 적은 수의 ‘남은 자들’이다. 열에 아홉은 그 자리를 맴돌 때 “나를 보내소서.” 하고 자신을 투신하는 자는 드물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두 제자로 삼은 자들은 아니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그러므로 보내심을 받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2) 어느 때까지니이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사 6:11-12).”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다.’ 사람 사는 동네에 왕래가 끊기고 이중삼중 보안장치로 서로의 ‘토지가 전폐하였다.’ 이에 ‘사람들을 여호와께서 멀리 옮기셨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저마다의 인간관계는 척을 지고 살게 된지 오래고, 저마다의 영혼은 황폐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남은 자, <거룩한 씨>를 가진 자들은 있었으니, ‘십분의 일’이 오늘의 인류를 지킨다. 주의 심판의 날이 더딘 것이 아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아직 남은 ‘한 영혼’을 찾기까지 참으신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오늘 날 우리 현실이 아무리 그러하다 해도, 심지어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사 6:13).” 이에 오늘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자이면 보내심을 바라며, “나를 보내소서.” 하는 “거룩한 씨로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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