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30 주일
이사야 7장
임마누엘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들어가는 말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막 4:24-25).”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헤아림에 대하여’ -짐작하고 가늠하거나 미루어 생각한다는 뜻을 기반으로 하여 한 단계 더해지는 시각으로 오늘 본문에서의 ‘임마누엘’을 열어보려 한다. 우선 사도 마가는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하였는데, 이는 “어떻게 듣는가?”의 문제로 발전한다. ‘무엇’은 사실이나 사물에 대해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로 뒤에 붙은 목적격조사 ‘을’에 의해 우리가 스스로 듣고 삼가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로 이어지게 한다. ‘어떻게’는 부사로 어떤 방법이나 방식으로, 무엇을 접근할 것인지를 유도한다.
사도 누가는 이 동일한 말씀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눅 8:18).” 하는 주의 말씀을 증언하는데, 이를 직역하면 ‘조심하여 들으라’는 것이다. 그 안에 숨은 뜻을 똑바로 듣고 깨달으라는 의미다. 이를 또한 사도 마태는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 하는 말씀에서 ‘무엇을’이 남을 비판하는 것으로 접근시켰고, 앞서 누가는 이어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를 ‘주라’는 행동지침으로 명확히 강조하였다.
정리하면 마태는 ‘비판하는 것’을 마가는 ‘듣는 것’을 누가는 ‘주는 것’을 주목하면서 ‘우리의 헤아림이 우리로 헤아림을 받게 한다’고 하였다. 이를 풀어보면 남을 비판하게 되는 것은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행함으로 자신마저 자신에게 속는 결과를 갖는다. 이에 바울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하고 ‘심고 거둠’의 원리로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 즉 오늘 이 땅에서의 결과 그 너머에 있는 영원한 나라에서의 거둠으로까지 확대한다.
오늘 본문으로 접근하면 ‘우리가 헤아림으로 심고 거둠은 이 땅에서의 결과를 넘어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서이다.’ 이에 예수님은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하여,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하신다. 이를 알았던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늘에 소망을 두었고,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다시 말해 이 땅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았다.
본문이해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들의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이는 그의 손으로 행한 대로 그가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0-11).” 이것이 곧 ‘헤아림’의 근원으로 “주는 책략에 크시며 하시는 일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며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렘 32:19).” 하는 선지자들의 증거를 사도들이 각각의 시점으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천국에 소망을 두는 것으로 우릴 이끌었다. 하여 요한은 결론과 같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하고 공관복음의 ‘헤아림의 원리’를 정의하고 있다고 하겠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 생애를 진술하는 과정에서 사도들의 시점이 각각 다른 것도 성령의 감동으로 한 길로 모아져 우리의 승리를 약속한다.
1. 연기 나는 두 나무토막(1-9).
당시 유다 왕 아하스는 우상을 섬기면서 유다는 약해졌고, 북이스라엘과 아람군 연합이 침공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든 것으로 죄를 끌어오고, 죄로 인하여 우리의 믿음은 약해진다. 그런 가운데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사 7:7).” 하심으로 ‘<임마누엘>을 전하신다. 곧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결국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주도된다는 것을 알리면서,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2).” 하심으로 실제 ‘우상화 된 우리의 노력’으로는 굳게 설 수 없음을,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사 7:9).” 이렇게 단정하고 계신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실제 얼마나 허무한지,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라 비유하신다. 실제 주전 733년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고, 앗수르는 주전 612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였다.
2. 임마누엘의 표적(10-25).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그 날에’ 판가름이 난다. 오늘 본문에서는 각각 18, 20, 21, 23절에서 연속으로 ‘하나님의 작정된 심판의 날’ 곧 ‘그 날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고 계신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메시아는 곧 임마누엘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이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를 더욱 구체화시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하고,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임마누엘 하나님’이 지키신다고 강조한다.
이를 이사야는 다시 강조하면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 곁에 오셨다. 이사야의 예언은 유다 멸망 전에 이루어졌고, 예수님이 오시기보다도 수백 년 전에 전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고, 임마누엘의 능력과 긍휼하심이다.
즉 북이스라엘과 아람 연합의 나라들이 공격하여 약해진 유다를 침략하지만 결국 저들은 ‘연기 나는 두 나무토막’에 불과하듯이 오늘 우리를 어렵게 하는 세상의 악한 권세들도 “그 날에” 이르러는 다음과 같이 연속적으로 멸망할 뿐이다.
3. ‘그 날에’ 있을 <네 가지 심판의 예표>
하나,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곳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 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사 7:18-19).”
당시 유다를 괴롭히는 침략군은 앗수르 뿐 아니라 애굽도 있었다. 이사야는 애굽을 파리로, 앗수르를 벌로 비유한다. 애굽이 유다를 유린한 것은 주전 609년 요시야 왕 때이다(왕하 23:28-30). 그러나 결국 애굽은 4년 뒤인 605년에 바벨론의 손에 넘어간다. 앗수르에 의한 유다의 피해는 히스기야 왕 때에 극심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파리와 벌’로 여호와의 섭리에 따른 것임을 알린다.
둘,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 털과 발 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사 7:20).”
여기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는 당시 다메섹의 공격을 받은 유다의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상당한 양의 돈을 주고 그의 도움을 청한 사실을 빗대어 말한다(왕하 16:7-8). 그러나 저들의 칼을 빌려 위기를 모면하려 한 것인데, 이를 다윗이 암몬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오히려 머리털부터 발털까지 깎이는 수치를 당한 사건을 상기시킨다(삼하 10:4-5).
셋,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사 7:21-22).”
벌거벗은 황무지처럼 유다는 비참하다. 남아 있는 소유는 겨우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뿐이다. 인구도 현저하게 감소하여 암소 두 마리에서 얻는 젖이 남아돌 정도이다. 그만큼 피폐된 현실에서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버터)과 꿀을 먹으리라.’ 즉 앗수르의 칼날을 피해 ‘남아 있는 자’들에게 제공될 음식은 ‘응결된 젖과 야생 꿀’이 전부이다. 달리 표현하면 그런 가운데서도 ‘남기신 자들’을 주가 돌보시며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다.
넷, “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사 7:23).”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가 ‘찔레와 가시’를 내는 황무지가 되었다. ‘남은 자들’은 ‘버터와 야생 꿀’로 버티고 연명해야 한다. 포도와 곡식으로 가득하였던 언덕은 가시덤불로 덮였다. 유다에 임할 비극은 참혹하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때마다 ‘남은 자’를 두셨고, 저들로 그 모든 상황을 이겨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알게 하셨다. 이를 삼가 바르게 헤아려서, 우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가 무엇을 듣는지, 어떻게 들었는지, 이를 나누어주며 그 삶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가 주의할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나오는 말
이 땅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학교다. 우리는 오늘도 요담과 애굽과 앗수르의 공격으로, 저들은 ‘파리와 벌’과 같이 성가시고 고통스럽다. 때로는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덤불과 푸른 풀밭 등’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이는 노아 홍수 이후 세상이 좀 나아졌는가? 하면 사탄의 기승은 여전하다. 사탄은 자기 일을 한다.
그때에 우린 ‘하수 저편’ 칼날을 빌리려하거나 암몬의 도움을 구하려다 머리털과 발털까지 밀리고, 수염이 깎이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고, 세상문화는 승승장구한다. 하나님은 이처럼 앗수르를 ‘진노의 막대기와 몽둥이’로 사용하신다. 그러나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사 10:5).” 곧 우리의 수고는 헛되어 ‘괭이로 갈던 산에서 찔레와 가시나무’가 무성하다.
이에 “이사야가 이르되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3-14).” 우리가 듣고, 비판하는 것에 대하여 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을 부여하심으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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