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09 주일
이사야 5장
화 있을진저!
사 5: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사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사 5:3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사 5:30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우리라
들어가는 말
‘모든 의미는 비교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우리는 세상을 보며 자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산다. 남들처럼 되는 것으로 안심하고 그 의미를 확장하려 안간힘을 쓰며 산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려니 하고 일반화하면서, 우리의 깨달음은 언제나 슬픔의 자리에 있다. 잃고 난 후에야 가졌던 것의 소중함을 아는 일도 그 때문이다. 적당하여서 모든 게 적당할 때는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는다.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에게 외마디 비명같이 ‘화 있을진저!’ 하고 여섯 번이나 힘찬 고함을 친다. 이 놀라운 경고가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주께서 바라시는 것은 분명하였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1-2).” 이 얼마나 속상하고 답답한 일인가?
오늘도 우리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탄식하신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4).” 자신을 내어주어 죽기까지 사랑하여 돌보셨는데, 과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지? 이에 우리의 헛된 수고와 애씀에 대하여 본문에서, <여섯 가지의 ‘화 있을진저!’> 하는 호통 치시는 경고를 듣겠다.
첫째, 탐욕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8).” 저마다 자신의 소유에 연연하고 이 땅에서의 것으로 자기 혼자 누리기를 꿈꾸는 우리의 욕구에 대하여,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하여야 우리 영혼은 만족함을 누릴 수 있을까? 세상은 언제나 자기보다 못한 자와 비교하여 자신의 의미를 부여한다.
둘째, 쾌락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스스로의 위로와 만족을 위해서는 무엇에든 중독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 열심으로 사는 ‘일중독’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릇된 관계를 추구하는 ‘사람중독’과 저마다의 취미나 보람을 우선하는 ‘자기중독’ 등 우리의 만족은 아침의 독주 같다. 그리하여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12).”
셋째, 불신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서로가 속고 속이는 일은 가까운 사이나 먼 사이나 다를 게 없다. 저마다의 가면을 쓰고 역할극을 하는 배우같다. 자기를 꾸며 실제의 자신도 알지 못해 스스로 불신한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19).”
넷째, 위선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언제부턴가 진실은 불편하다. 적당한 선에서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어둠을 밝음으로, 밝음을 어둠으로, 단 것을 쓴 것으로 비틀어 서로는 위선을 떤다.
다섯째, 교만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교훈을 꺼려하고 훈계를 질색하는 사회다. 스승이 사라졌고 자식을 훈계할 부모가 없다. 모두가 그만큼 교육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만큼 이러한 현상을 더 나아진 사회로 착각한다.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자신을 스스로 주체할 수 없다.
여섯째, 객기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과잉 몰입과 극단적 용기가 생명을 위협한다. 자신의 목조르며 혼절 직전까지 참기, 철길 위에서 찰나의 순간을 챌린저로 유행시키기 등.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며 생명을 담보로 선과 악을 혼용하고, 어둠과 빛을 뒤섞었다.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23).”
본문 이해
오늘 본문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외침이다. <화 있을진저!> 하고 우릴 불러 세운다. 이에,
1. 우리 삶은 하나님의 포도원과 같다(1-7)
이사야는 하나님을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1).”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이 되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즐거워하는 삶이다. 그를 믿고 의지하며 오래 참고 기다린다. 이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예수님도 일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다(마 22:37-38). 하나님을 믿는 자로 하나님을 알고, 겸손히 주를 섬기며, 순종하려고 할 때, 세상은 끊임없이 우릴 쥐고 흔든다. 하여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왜냐하면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우리가 맺을 열매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2. 죄에 따른 멸망에서 구원하심을 얻었다(8-17)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하는 말씀과 같이 욕심을 내면 사치하고, 향락에 빠지고, 과욕을 부리다 망한다. 크고 안락한 집에 살면서, 일찍부터 술에 취하고 괘락을 즐기며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한다. 공허한 저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을 비교한다. 낮추어 겸손히 주를 섬길 능력을 상실했다. 그 영혼은 평안을 잃었다.
바울은 옥에 갇혀서도 두려울 것 없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에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 2:30).” 이는 공통적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그러므로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사 5:16-17).”
3. <화 있을진저!> 경고의 외침을 듣는 자가 복이 있다(18-30)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예외가 없으시다.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할 줄 모르면 자신의 죄를 미화하거나 희석시킨다. 가벼이 여기는 만큼 죄에 따른 심판의 무게는 올라간다. 우리가 신약 시대를 살면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은혜 가운데 살고 있지만 각자 저마다 행위의 열매를 먹고 산다.
이에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잠 1:30-31).” 그에 따른 행적은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32-33).” 하여 오늘 우리는 말씀의 교훈을 따라 믿음으로 살기를 바란다.
나오는 말
‘고난은 성도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확성기’라는 표현과 같이 오늘 우리는 <화 있을진저!> 하고 외치는 비명처럼 경고를 듣는다. 세상은 화려한 불꽃같이, 그루터기까지 삼킨 것 같이, 우리는 언제부턴가 믿는 자로서 줏대도 없다. 제대로 된 확신도 없다. 쓸려 다니는 검불 같다. 저마다 교회를 탐방하듯 옮겨 다닌다. 어디에도 뿌리내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서로 아는 것을 꺼려한다. 그저 서로는 ‘친절한 타인’으로 족한 성도의 교제로 만족한다. 그러므로 서로에 대한 중보기도가 힘이 없다. 마른 풀이 흩어지듯 어떤 어려움을 앞에서 서로를 묶고 있던 신념과 이상은 헐거워져 늘어졌다가 풀어진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이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사그라진다. 사그라진 마음을 낚아채려고 마귀는 호시탐탐 틈을 노린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이 틈은 아주 미세하고 사소하여서, ‘이 정도는 괜찮아!’ 하고 서로가 서로를 세상 속으로 끌어당긴다. 기어이 땅 끝에 이르러 노인이 되어 회환뿐이다. 이상과 현실은 간극을 멀리하였고, 현실과 죽음은 한 뼘 거리다. 기어이 우리 영혼은 마지막 문턱에 다다라서 탄식한다. ‘우물쭈물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하는 영국의 희극배우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고 빛은 구름에 가려서 어두우리라(사 5:30).” 뒤늦은 후회가 우리 목을 낚아채기 전에, <화 있을진저!> 하고 오늘도 주의 외침은 우릴 붙들어 세우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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