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전봉석 2024. 7. 13. 02:2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4:12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 120:1

 

 

우리가 환난 중에도 인내하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즉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 우리가 들은 복음 진리의 말씀은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 11:10).”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시 119:43).

 

하는 시인의 기도와 같이, “네가 진리의 확실한 말씀을 깨닫게 하며 또 너를 보내는 자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회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잠 22:21).” 하신 말씀을 삶에서 이루려 하는 것이다. 이에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전 12:10).” 이렇듯 오늘도 말씀 앞에 앉히고 나로 주를 바라게 하심이 복되다.

 

나는 친구가 꾸준하게 새벽예배를 나가고 그때마다 듣는 말씀을 되새기며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그저 습관처럼 반복되는 일 같으나 성령의 역사하심이란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고후 6:7, 엡 1:13, 골 1:5).”

 

이에,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이것이 우리의 하루이고 날들이며 주어진 한 생의 역사다. 그렇게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18).” 이에 구속 받은 자의 낙오란 있을 수 없다. 그 수가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그렇다면 시온산은 어디인가? 시온산은 예루살렘 동남쪽 구릉지대로 성전과 예루살렘 성 전체를 의미한다. 유다의 전 영토와 이스라엘의 전 족속을 의미한다. 시온은 구속받은 많은 무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모은 장소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48:1).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여기서 시온산은 ‘하늘의 예루살렘’과 ‘앞서간 의인들의 영’들과 ‘예수께서 계신 곳’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곧 시온산과 십사만사천 명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교회이다. 그런 우리는 신분과 소속이 다르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 14:1).” 또한 구속의 감격을 아는 자들이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2).” 구속함을 받은 사실로 제사장의 나라가 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다. 그들의 노래는 새 노래다. 그 주제는 구원이다. 이 감격은 오로지 구속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만 있다. 우리는 정결한 자들이다. 모든 길에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안다. 오로지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세상이 하는 일과 대조된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

 

그러므로 오늘의 내가 허투루 삼을 나 자신이 아니다. 곧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습 3:13).” 바로 이 ‘남은 자’의 삶은 이 땅의 편리와 만족과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이에 따른 “진리의 복음”을 붙들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께 영광을 돌린다. 심판이 곧 이르렀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한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실은 오늘과 같은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 숫자나 의미를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무엇인지 알고 이를 붙들고 나아가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곧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후 4:18).”

 

이에 천국에 들어갈 자로 더 큰 영광을 소망하고 사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우리가 붙들고 씨름하며 놓지 않으려하는 것은 주의 영광을 사모하는 그것이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95:1).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21).”

 

그런 마음으로 새벽을 깨운다. 주 앞에 나와 말씀 앞에 앉힌다. 누구와의 성경공부에서든지 우리의 나아갈 길을 디딤 발로 딛고 서있는 말씀을 의지한다. 친구는 묵상을 할 때 적용을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고 물었다. 그때 나는 발과 발의 간격은 디딤 발과 내딛는 발의 보폭이라고 대답하였다. 즉 우리가 주를 알고 믿는 개인적인 만남과 그 부르심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보폭의 넓이가 확정되는 것이다. 막연하게 어찌 살라는 구호나 다짐이 아니라 실제 내딛는 발이 다시 디딤 발이 되어야 우리는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곧 적용이란 내가 받은 은혜의 자리에서 저만치이다. 서로의 보폭이 다를 수 있고 나아가는 속도도 다르겠으나 그 방향은 같다. 먼저는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7-18).” 곧 더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묵상과 적용에 있어서 친구의 질문은 순진하였고 나의 설명은 단순하였다. 이는 우리가 알고 모르고, 잘 하고 못하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7).” 그리하여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

 

우리의 사는 목적은 하나다.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렘 13:16).”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후 4:15).” 이를 위하여 우리는 날마다 깨어 있는 영혼으로 산다. 이는,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2-3).”

 

하여,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23-24).”

 

주가 이루실 것이다. 보전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그럴 수 있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이를 알 때,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120:1).

 

그때에는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곧 오늘 우리 안에 두시는 주를 경외함으로 산다. 이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 엄청난 사실 앞에서 우리가 인내하고 견딘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이런저런 우려와 염려가 혹은 환난과 고통이 우릴 위협하나 우리는 그것으로 주 앞에 더욱 가까이 간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 그러므로 사모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적용하여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이에,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120:2-3).

 

나로 인하여 주 앞에 더 애통해하며,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6-7).

 

그러한 세상에서 주를 더욱 바람으로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하여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