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 18:4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 124:7-8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바벨론은 붕괴된다. 우리로는 저들이 받을 재앙에 참여하지 말 것을 촉구하신다. 저들은 교만하고, 사치하고, 음행하고, 우상을 숭배한다. 저들은 자기 영혼을 팔아 이를 만족하게 한다. 이때에 우리는 영광스런 존재의 의무를 부여받았다.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18:1).”
곧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사 52:7-8).”
같은 날을 살면서 같은 것으로 힘들어하는 것 같으나 우리는 엄연히 그 주어진 사명이 다르다.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고로 우린 우리의 온몸으로 선포하는 자들이다.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계 18:2).”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자신에게 선포하지 않으면 자신의 외침으로 끌려 다닌다.’ 여기서 자신의 외침이란 늘 입에 붙은 부정적인 말이나 습관적인 하소연이 종일 나를 이끈다. 아침에 눈을 뜨기 무섭게 어디가 아픈 것부터 근심과 걱정이 나 자신에게 아우성이다. 이에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평과 자신의 판단과 기준에 따라 남을 비난하고 탓하느라 정신이 없다. 우리의 본성이란 그러하여서 스스로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 같다. 뭐가 잘못된 것인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움직일 때마다 깨지고 박살나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알지 못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바벨론아 네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계 18:14).”
이러한 결말을 우리는 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벨론아!’ 하고 오늘 본문은 외친다. 우리가 그토록 믿고 의지하였던 것들이 산산조각이 날 때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당황하고 속수무책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긴 코와 덩치로 휘젓고 다닐 때마다 값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값진 것들이 깨지고 흩어진다. 그리하여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6-7).”
오늘 우린 이와 같은 현실을 보면서 덩달아서 나는 어느 쪽인가? 하고 부화뇌동할 게 아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모든 게 다 지나가고 끝이 있으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로 우리들은 영원할 것이다.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 붙는 역청이 되며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아니하고… 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승냥이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사 34:9-13).”
마치 오늘의 모든 게 영원한 것 같아서 서로의 사랑도 그러할 것을 장담하지만,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이렇듯 살아서 사는 동안에 이를 깨달아 돌이킬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상황이나 여건도 우리에게는 복된 것이었다. 이에 말씀은 우리로 이를 경계하고 말씀으로 살지 않는 자들로부터 떠나라고 하신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떠날 수 있는 용기, 그로 인하여 ‘미움 받을 용기’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세상 그 무엇도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다. 미워하기 시기한다. 이에 오늘 본문은,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우리로 ‘거기서 나오라’ 하신다. 우리로 거기서 나올 수 있도록 때론 징계하신다. 이는,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하여 오늘 우리가 겪는 어떤 분함과 서러움은 매우 정상이다. 오히려 주의 자녀이며 그의 사랑하는 자임을 알게 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되새기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너를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고 했던 어릴 적에 들었던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게 그땐 그렇게 싫었는데… 이를 멀리하고 저버리려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았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이 모든 게 은혜이었다는 것을 안다. 나만큼 주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살았던 자가 또 있을까? 예전의 어떤 일을 돌아볼 때는 그때 죽었어도 마땅하였을 죄인인데, 그때에도 하나님은 주의 은총으로 나를 감싸고 계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돌아보면 나의 삶은 그 자체로 간증이 된다.
그래서였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2-13).”
우리가 속한 교회와 그 가운데 한 영혼을 사랑하며 서로의 기도로 하나가 되는 것은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7-18).” 이와 같은 구별됨과 분명한 차이를 알 때,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 19:17).”
당시에 멸망하는 성 소돔과 고모라에서 강권하심으로 이끌어내었던 롯과 같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것이 오늘도 이 한 날의 사명이다. 내가 사는 길이면서 내 곁의 한 영혼을 거두는 일이기도 하다.
‘거기서 나오라’는 것, ‘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사 62:1-3).”
이 막중한 사명을 깨닫고 일어났을 때,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18-21).”
은혜 앞에서 우린 무릎을 꿇는다. 하필 또 장마철이어서 몸이 힘든데, 또 치과 치료 가운데 잇몸 뼈를 이식하는 수술을 하고 어제는 더 힘이 들었다. 몸이 아프면 마음은 한꺼번에 주의 이름을 되뇌는 것 같다. 치과에서 한 시간 남짓 어찌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오후께는 어깨가 뭉쳐 그게 더 아팠다. 저녁에는 콧물처럼 코피가 주르르 흘렀다. 나의 약함으로 나는 주께 더 나아간다. 경직된 몸으로 주의 이름을 수천 번은 되뇐 것 같다. 그러면서 누굴 생각하고 또 어떤 이의 일을 두고 주께 아뢰다, 내가 지금 저들을 생각하고 주께 고하는 것이 희한하기도 하였다. 그때 바울의 진실한 고백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저가 왜 자신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겠다고 하는지 알겠다. 고통스러워 끙, 하고 신음하며 돌아누울 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어서,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고 저가 그 자신의 약함을 사랑하였던 것을 말이다. 어찌 나의 약함이 자랑할 게 되겠나만 오늘의 이런저런 나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오히려 주께만 의지한다. 심지어는 죽을 것 같은 심정일 때,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욥이 처한 상황이 우리의 이런저런 일들로도 충분할 때에,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14, 16).”
곧 주가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내가 주를 신뢰하는 것은 그렇다고 내가 내 손으로 내 생명을 해할 수는 없는 일, 그와 같은 고통으로 나는 경건하여져서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된다. 내가 주를 믿고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은 이와 같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 앞으로 나를 이끌고, 말씀으로 나에게 선포하기 위함이니…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9-11).”
그러므로 오늘 나의 경건은 세상의 악하고 추함이 더할수록 주의 이름을 바람이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하여 오늘, ‘거기서 나오라’ 하실 때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계 18:20).”
그러므로 영적으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고,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시 124:1).
나는 이를 통감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2-5).
그때 그 시절, 나는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의 영혼은,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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