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계 17:14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시 123:3
사람들로 음행에 빠지게 한 이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다. 저 음녀는 짐승의 권세를 등에 업고 매우 사치스럽다. 가증한 물건으로 자기 몸을 치장하였다. 이마에는 비밀, 바벨론, 모든 음녀와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쓰였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계 13:1).”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모든 선정적인 세태가 그러하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은 우리를 부르신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17:1).” ‘이리로 오라.’ 하심은 당당히 보고 분별하라는 것이다. ‘이리로 오라’ 하시며 부르시는 직접적인 표현이 계시록에 세 번 언급된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4: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17:1).”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21:9).”
이리로 오라, 하신 후에 하나님은 ‘네게 보이리라.’ 하고 우리로 마주하게 하신다. ‘내가 네게 보이라.’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본질을 알리시고, 이로 구별되어야 하는 것을 우리에게 이르신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출 11:7, 33:16).”
이와 같이 구별하심을 삶에서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주의 일을 하는 데 따른 어려움으로다. 누가 전화를 하여 이번 여름성경학교 때 있었던 어느 형제아이와 그 엄마의 몰상식한 태도를 말하며 치를 떨었다. 자신은 여태 ‘그런 경우’를 겪어본 적이 없어서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하나님 앞에 한참을 토로하고 그 심정을 아뢰었다며… 그러다 이번 일을 계기로 주일학교 교사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그 심정이나 억울함을 이해하지만 그래서 그만두었다는 말에 그것이 오히려 후회가 되지 않을까? 하고 다시 생각하기를 권하였다.
또한 누가 개척교회를 한다는 소리에 적극적으로 응원하면서도 진득하니 무던하기를 바랐다. 요즘 같은 시대에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것보다 무모하고 답답한 일은 없다. 기존에 있던 작은 교회들도 현저하게 대형교회로 흡수되고 있는 실정에서, 내가 응원하는 것은 한 영혼으로 씨름할 수 있다는 것과 말씀으로밖에 버틸 수 없다는 것에서 고단한 일이기는 하나 주가 주시는 은혜 위의 은혜가 생동감 넘치는 현장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 또 둘째 아들이 신학교 기독교 교육학을 휴학하고 일반대학(?)으로 편입하려 한다는 소리를 했다. 그러면서 무엇보다 아이가 읽고 쓰는 데 있어 그 이해와 습관이 어렵다고 하면서 가르칠 수 있겠나? 하고 물었다. 무얼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우선은 ‘오라’, 하였고 ‘보이겠다’고 하였다. 무엇과 어떻게는 내 문제가 아니다. 주가 알아서 할 것이라 나는 확신하였다.
일련의 상황들을 대하면서 우리에게 더하시는 분별의 영의 구하게 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리의 판단과 기준이 세상적일 때 하나님의 기준은 모호해진다. 주일학교 교사와 부장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누구에게 내가 들려주고자 했던 말도 그것이다. 안다, 우리 주님이 다 아신다. 감당할 수 있어서 맡기신 것인데, 자신이 늘 대하고 마주하였던 예의바름과 옳은 기준에서 벗어난 경우를 못 견뎌하는 것도 일종의 교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으나 이를 말하지는 않았다. 감히, 나를, 하는 식의 태도가 은연중에 그의 실망 가운데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과 달라, 하는 어떤 고상한 기준을 훼손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개척교회를 운운하며 저의 앞서는 생각은 어쩌면 너무 낭만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저렇게 하면 잘 될 것 같다는 나름의 판단에 대해 하나님은 그야말로 우리의 상식을 깨뜨리신다. 이를 나는 ‘글방 선생’으로 있을 때와 ‘교회 목사’가 되고 난 뒤로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게 뭐지? 하고 그때는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 씨름은 혈과 육의 문제가 아니다. 상식의 영역이 아니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갈 데 없어 성적이 맞춰 어쩌다 기독교 교육학을 지원한 것 같으나 그로 인하여 친구 내외가 주 앞에 불려왔다. 오늘에 이르러 주의 일에 전념한다. 우연 같으나 하나님은 수많은 우연의 연속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감추고 계신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6-17).”
상식과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려고 해서는 답이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의 이해부족이나 몰상식한 언행의 문제가 아니다. 이 모두는 영적 전쟁과 같아서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한데 우리가 어찌 대적할 수 있을까? 이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8).”
하여 누구의 어떤 일로 저가 속상해하며 전화를 하였을 때 나는 저를 위로하면서도 그만두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또는 개척을 염두에 두고 이런저런 궁리를 하나 결국은 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일로 그 생동감 있는 현장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과만 상대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더러는 가족도 가장 가까운 이웃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거나 오히려 원수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에서 단단히 그 중심을 말씀에 묶어야 한다는 일로 나 역시 새삼 그 마음에 다짐을 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2-3).”
하여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으로 산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4-15).” 내가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때, 뭔가 잘 될 줄 알았던 그 기준이 허상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린 핍박이나 외로움이 어떤 어려움이 오히려 좌표가 되어주고 있다는 데서 안심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무난하여 서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어우러진다는 게 더 모순이다. 하나님은 일체 사람을 의지하는 데서 이를 비틀어놓으신다. 하나님 외에 다른 그 무엇도 의뢰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린 누굴 위해, 혹은 누구에게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더러는 아픈 게 일이고, 혼자 가만히 있는 게 고역이라 마음이 저 혼자 어렵고 힘들 때가 많으나 그것까지도 주를 바라는 기회였다. 주가 더하신 은혜였다. 저가 거지로, 몸에 헌데가 가득하여 개가 와서 핥는 신세로 부자의 집 앞에 온종일 버려진 것 같았으나 저는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부자’로 일컬어지는 이들로 자기만족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던 자들에게 반박할 수 없는 증인으로의 삶이 되었다. 이는 마치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즉 우리의 어떤 어려움이 또는 고달픔이 우리로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는 자로, 합당한 자로 지킨다. 종종 나의 꼼짝 못함을 두고, 나는 그것으로 이처럼 기를 쓰고 새벽 일찍 눈을 뜨기 무섭게 교회로 달려오게 된다. 누가 알아주든지 말든지 말씀 앞에 앉히고 묵상글을 쓰고 누구 이야기를 들어주고 저로 주 앞에 설 수 있다면 나의 하찮은 말이라도 보탠다. 더러는 저들이 그러면서 나의 안부를 한 번도 묻지 않는 데서 서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다들 자기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교회는 어떤지 그 형편은 좀 어떠한지 이상할 정도로 저들은 나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그것이 서운하다가도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누군가 내 곁에 있어 나를 위로 하여 내가 저로 위안을 삼으려 할 때 하나님은 이러한 인과관계를 막으신다. 그래서 때로는 일방적이다. 저들 이야기만 늘어놓다 끝난다. 더러는 뭐라 권하는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다들 자기 말만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누군 늘 자신의 기도제목과 그 내용만 줄줄 나열하고 한 번도 나의 어떤 부분에 대해 묻지는 않는다. 그럴 때 느끼는 어떤 외로움으로 나는 저절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너무 가까이도 너무 멀어지게 하지 않으시면서 하나님은 저 한 영혼을 내게 두신다. 내가 저로 너무 밀착하여 그 일에 함몰하는 것도 하나님은 금하신다. 또한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 17:2).” 그러니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은 전적으로 주의 권능으로 주의 사랑으로 하는 일이다. 내가 연민하는 마음으로 혹은 뭔가 이로움을 주려고 넙죽대다 주의 뜻을 외면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6).”
또한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누구의 어떤 일에 대하여 주의 뜻을 살핀다. 저의 이런저런 기대가 아니고, 어떤 예상의 결과가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하여 때로는 무모하고 때로는 답답하나 그럼에도 노아처럼 혹은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또는 언제까지 이 일을 되풀이해야 하는지 할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저 덤덤하니 또한 무던하게 오늘도 내게 두신 이 한 날에 충실한 것은,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일의 결정을 알고 간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시 123:3).
하고 주 앞에만 아뢰고 또 의지하면서,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6-7).” 그리하여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5).”
곧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6).”
주가 하신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123:1, 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0) | 2024.07.18 |
---|---|
우리의 도움은,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0) | 2024.07.17 |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0) | 2024.07.15 |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0) | 2024.07.14 |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0) | 2024.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