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전봉석 2024. 7. 19. 03:27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계 20:1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한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사탄을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가두었다. 그 감금되어 있는 동안 성도들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 천년왕국이 지나 사탄이 잠시 풀려나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그들을 통해 성도의 진을 포위한다. 그러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곡과 마곡의 군대를 소멸한다. 사탄의 하수인들은 불못에 던져진다.

 

이와 같은 말씀을 읽을 때면 이러한 소재로 한 영화들이 떠오른다. 그런 영화에 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 이를 흥미롭게 본다. 신학에서 뜨거운 감자 같은 천년왕국의 이해는 학문적으로도 난해하게 다뤄진다. 이를 전천년설, 후천년설 혹은 무천년설로 주장이 나뉜다. 나름의 타당한 성경구절을 뒷받침 근거로 들고 나서지만 오늘 말씀에 대한 해석은 어떠하든지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이나 허황된 영화의 소재 따위는 아니다. 어느 주장을 따르든지 우리의 이해와 해석은 한계가 있다.

 

이를 너무 지나치게 주장하다 각자의 교파로 갈리기도 했다. 순복음은 성령운동을 강조하고, 성결교는 생활을 강조하고, 감리교는 기도의 은사를 강조하고, 장로교는 말씀을 강조한다. 여기서 또 여러 갈래로 나뉘어 파생되는 이단의 수도 엄청나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이를 정확히 다 알 수는 없다 해도 겸손한 태도로 진리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이해로는 둔하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히 5:11).”

 

이를 지나치게 자신의 이해와 논리로 알려할 때,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5-17).” 하여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우선이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그러므로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곧 성경의 난해한 부분에 대해서는 모르면 모르는 대로 놓아두는 것도 옳다. 이를 억지로 풀다 이단이 되거나 자기모순에 빠져 스스로의 앎을 신봉하기 십상이다. 오히려 우리다 다 알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우리 몸의 신비도 다 규정할 수 없고 알지 못한 가운데서도 살아가듯이 실제 우리가 아는 세계보다 알지 못하게 가둬 놓으신 세계가 더 크고 넓다. 그래서도 나는 나의 어쩔 수 없음과 우리의 어쩔 수 없음으로 주께 간구한다.

 

친구는 ‘하라다 증후군’에 걸렸다. 눈의 망막 안쪽 저 어디 뒤편에 염증이 생긴 것인데 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안과전문의들도 모른다. 다만 스테로이드제 약물로 이를 치료하고 억제할 수밖에 없는데, 장기 복용으로 인해 두 개의 고관절이 괴사하였다. 결국 시력은 유지되었으나 두 개의 고관절은 인공뼈로 수술해야 했다. 그 뒤로도 백내장수술도 하고 눈을 보호하는데, 여전히 뿌옇고 막이 가려진듯하여 꾸준한 관리를 받고 있다. 왜 그런 병에 걸렸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어떻게 낫게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심해지면 스테로이드제가 들어간 안약이나 먹는 약을 처방할 뿐, 이 또한 늘 부작용이 따라서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친구의 이런 일로 누구에게 문의하다 저의 아들애가 사춘기가 와서 요즘 아주 힘들게 한다며 이런저런 하소연과 기도를 부탁받았다. 아이는 선천적 기형으로 6학년이 되었는데도 혼자 서지도, 걷지도, 말도, 몸을 가두지도 못한다. 음식을 섭취할 수 없어 목에 구멍을 뚫어 호흡을 돕고, 옆구리로 매 끼니마다 음식을 공급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아이아빠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쓴다. 이제 얼추 20킬로그램이 넘는 아이를 건사하느라 자주 허리나 어깨를 혹사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들은 사춘기가 오면 평소 혼자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아이인데도 바동거리며 혼자 문지방을 건너기도 한다.

 

나는 요즘 잇몸뼈 이식수술로 항생제를 먹느라 소염진통제는 자제한다. 가뜩이나 날이 궂은 날의 연속이라 허리며 무릎이며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다. 어제오늘 허리가 너무 아파서 복대를 하고 있는데도 반듯이 눕지도, 돌아눕지도, 서지도, 앉지도 못하겠어서 지금도 끙, 하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 글을 쓴다.

 

저마다의 이런저런 고통과 사연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나는 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하고 같이 기도한다. 나는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놓고 주께 간구한다. 아이부모도 그런 아이를 안고 퇴근 후 교회로 기도하러 간다. 우리의 이 ‘곡과 마곡’ 같은 땅에서 서로의 어쩔 수 없음을 놓고 주의 도우심을 구한다. 우리 몸을 지배하는 고통의 사탄이나 정신과 마음을 흔들고 다니는 미혹하는 영들을 두고 주께 아뢴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우리는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를 자고 예수를 따름으로 부활에 참여하는 삶을 산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이는 오늘 말씀에서와 같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6).”

 

여전히 이 땅에 사는 동안 이별도 고통도 우릴 가두고 포위하려하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의지한다. 일련의 어려운 상황에서 둘째 아이가 남은 학기를 마치기 위해 필리핀으로 가야하고, 가는 아이나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나 그 심정을 어찌 헤아릴 길 없어 나는 아득하다. 궁극적으로는 감사한 일이었으나 나 역시 아이를 보내놓고 힘들었던 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리다. 그런 가운데 또 다들 사느라 전전긍긍 매인 몸이라, 서로는 각자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씨름한다. 그러니 우린 무엇으로 저마다의 어쩔 수 없음을 가지고 살 것인가?

 

나는 누구에게 위로하다, 그때 어린 내게 ‘하나님이 너를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주었던 아버지에 대해 지금에 와서야 그 말씀이 무엇인지 알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땐 그 소리가 참 싫었고 그 의미도 알지 못하여 반항하고 투정하고 배회하던 ‘사춘기’ 같은 날들이 고단하기만 하였는데… 그때 겨우 난 열네 살 어린것이 뭘 하겠다는 것이었는지, 수면제를 6개월간 동안이나 조금씩 모았다. 앞서 5학년 때 아는 형의 자살은 어린 내게 ‘신기하고 부럽고 놀라운 결정’이었다. 사탄은 기회를 엿보다 우리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염증’ 같다. 속수무책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그땐 그 결정이 나의 최선이었다.

 

어쩔 수 없는 고통으로 스테로이드제를 써서 염증을 억제하고, 그 부작용으로 다른 고통이 따라오는 악순환과 같은 인생을 지내는 동안 우리에게 축복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아픈 아이를 들춰 업고, 그런 가운데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를 위해 예배당으로 기도하러 가는 부모의 심정을 나는 헤아리려하다 끙, 하고 돌아누우며 나의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우리의 영적전쟁을 두고 오늘은 또 어떻게 씨름하며 살고 있는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이에 그 흔적,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위하여 오늘도 주 앞에 나아와 말씀 앞에 나를 앉히었다.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 이와 같은 어쩔 수 없음이라면 나는 이 어쩔 수 없는 고통을 사랑할 테다. 유난히 허리가 너무 아파서 글을 쓸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 126: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