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전봉석 2024. 7. 23. 03:15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 2:1-2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 130:5

 

 

그녀는 얕은 물에서 다이빙을 하였다가 목이 부러지면서 사지마비가 되었다. 저는 병상에서 자기 영혼이 단련되었고 병원은 하나님의 선교지였다고 하였다. 훗날 3기 유방암과 만성통증으로 울면서도 말씀으로 위로를 삼았다. 저의 이름은 조니 에릭슨 타나이고 ‘조니와친구들국제장애인센터 설립자’이며 구필화가로 강사로 활동 중이다. 그녀를 붙들고 있던 말씀은,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 94:19).

 

하는 시편의 기도와 찬송이다. 하나님의 천지는 완성되었고 이를 모두 지으신 뒤 칠 일째 되는 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안식하셨다. 더러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이나 불가피한 현실 속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완전하시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시작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 그리고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2).”

 

앞서 조니의 경우와 같이 극히 예외적이고 특별한 일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진다. 주가 맡기심은 우리로 그리할 수 없을 때 그리할 수 있는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다. 친구의 어려운 사정의 그 육신의 고통을 위로하며 나는 우리에게 더하신 이 귀한 특별함이 은혜인 것을 주장하였다. 욥이 욥다울 수 있었던 것은 상상하기 싫은 그의 고통을 지나 비로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하는 고백이 가능하였다.

 

앞서 요셉의 경우에도 저의 인생이 배신과 억울한 누명으로 그 속에 노여움이 가득하였을 텐데,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하나님을 인정하는 데서 자신의 노여움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였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우리는 살면서 사는 동안에 이런저런 부조화와 불합리한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창조 역사를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 지혜자는 말하길,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전 3:14).” 곧 오늘 우리가 겪는 어떤 어려움, 그것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한 고통이든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한 고달픔이든지 이를 두고 바울은 여러 번 기도하다 깨달았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8-9).”

 

나 역시 같은 내용의 기도를 수도 없이 하고 간절하였으나 그것으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나의 특별함’을 주가 더하신 은혜로 여긴다. 이를 친구에게 나누며 저가 지금 안고 있는 그 마음의 어려운 점이 찬송이 될 것을 장담하였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 40:26).”

 

하나님의 창조에서 허투루 여길 게 없다. 오늘의 모든 상황은 가장 선하고 가장 귀한 은혜의 자리이다. 이로써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 이와 같은 선언으로 모든 게 온전하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나의 육신의 연약함이나 고통 예찬론자 같이 거들먹거리듯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아픈 게 싫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오늘 첫 구절의 말씀과 같이 다 이루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그러므로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20).” 살면서 사는 동안에 겪는 고통으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그러므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이를 통하여 자라간다. 더욱 주의 사랑과 그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이제는 안다. 그 증거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이는 우리 모든 사람 안에 있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 그것으로 한쪽은 주를 더욱 사랑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고, 한쪽은 자기들 좋은 대로 우상을 두거나 자신의 판단을 따라 가는 것이어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하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우리의 악함도 날로 성장하듯이 다양하고 교묘하여 자신마저 알지 못하게 한다. 이에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처음 사람 아담이 잃어버린 ‘생령’을 우리는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되찾았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나는 내가 하려 할 때 주의 은혜가 억울하고 분하기만 하였다. 누군 지금의 어려움 가운데서 더 깊은 곳으로 파묻힌다. 저의 모친은 첫 아이를 낳고 아이의 선천적인 질병을 두고 이를 목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다 교회를 떠났고 하나님을 저버렸다. 아이는 그런 엄마와 언니에 대한 비밀을 숨기다 글로 쓰고 같이 주일을 지키며 예배를 나오다 기어이 그 엄마의 반대로 글방도 교회도 떠나야 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 어찌 지내는가 하고 보았더니 아이는 심한 우울증으로 살고 있는 아파트 울타리를 맴돌고 있었다. 같이 예배드리자, 글 쓰자 하고 권하여도 저의 영혼은 침잠하여 가라앉은 상태였다.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눅 6:5).”

 

우리가 주일을 지켜 주를 찬미하는 것은 오늘 나의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꿀이 달다는 것을 먹어보고 아는 것과 같이 그것이 어떤 성분으로 무엇과 무엇의 조화로 그런 맛을 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린 다만 맛으로 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19:103).

 

하여 나는 나를 말씀 앞에 먼저 앉힌다. 이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5).” 곧 주의 은혜 가운데서 이와 같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심을 받는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이것이 어떻게 해서 그런지, 어떤 작용을 일으켜 내 안에 이와 같이 역사하시는지 나는 알지 못할 때도 그러함을 안다. 곧 이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이를 따라 오늘도 이른 새벽 말씀 앞에 앉아 나의 날들을 주께 감사하며,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119:160).

 

하고 주 앞에 아뢴다. 결코 나는 무엇도 장담할 수 없지만,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119:89-90).

 

이를 인정하는 데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고백은 가능하여진다. 앞서 조니와 같이 어떻게 사지마비가 되고 유방암에 만성통증을 앓으면서도 병상을 자기 영혼의 단련장으로, 병원을 하나님의 선교지로 여기며 그와 같이 멋지게 승리하며 살 수 있었을까? 이를 바울의 고백과 요셉과 욥의 고백으로 알게 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 우린 이미 그 완성된 나라에서 산다. 살면서 주의 은혜를 몸소 겪고 찬송한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상황과 여건 속에서 주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일은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어릴 적 억울하였던 일이나 마음의 상처들이 더는 나를 찌르지 않는다. 사느라 기를 쓰고 살면서 내 안에 쌓인 억하심정이 오히려 주를 인정하는 회개가 되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를 찬송하면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0).

 

주께 바라는 것,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이 땅에서의 오늘이 더러는 고통스럽고 힘에 겨워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이 모든 게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게 되면서,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10:14-15).”

 

나는 이와 같은 말씀으로 친구의 힘든 사정을 축복한다. 그것으로 새 힘을 얻고 주께 찬송하자고 권하였다. 그리 말하면서 내가 더 가슴이 뜨거웠다. 그러니 하루하루 주어진 날을 사는 일이란,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 30:15-16).”

 

이에,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130:1-2).

 

주가 아니시면 누구에게 이런 소릴 할까?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