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24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아담의 부재가 크게 다가온다. 저는 왜 여자가 선악과를 먹을 때 이를 저지하지 않았을까? 그가 그때 그 자리에 없었거나 있으면서도 방관했거나 알면서도 동조했거나… 처음 사람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잃어버렸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하신 하나님의 처음 사랑을 잃은 것이다. 이를 사탄은 비틀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사탄은 벌써 우리 속에 그와 같은 마음은 넣었다. ‘어쩌다 죄악’은 없다. 죄는 실수가 아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하여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에서는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0-11).” 그 마음에 노여움을 품고서는 주의 사랑을 온전히 알 수 없다. 말씀을 살짝 비틀거나 뒤집는 일은 흔하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작정하고 거짓말을 한다기보다 살짝 부풀리거나 소분하여 감추었던 것이 거짓에 거짓을 더하여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사 5:18-19).” 자신하고 스스로 장담하는 일에서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1:7-8).”
19세기 영국의 극빈 고아들을 위해 여러 곳에 고아원을 설립한 뮐러는 1870년 여든다섯에 40년을 같이 했던 아내를 잃었다. 저는 장례식장에서 설교하기를 ‘모든 일은 그분의 복되신 성품대로 이루어진다. 그분은 선하시고 모든 것이 선하실 뿐이다. 아내의 죽음 또한 주의 뜻으로 나의 본분은 하나님께 만족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C. S. 루이스도 아내를 잃고 쓴 <헤아려 본 슬픔>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나의 뜻을 바라다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일이다.’ 하고 언급하였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이란 그분과의 언약을 붙들고 사는 일일 텐데, 그분은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르시길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 우리는 이와 같은 사명을 가졌다. 이에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당장 어떤 일을 당하고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그것으로 주를 바라거나 멀리할 수 있다는 것, 여자는 사탄의 유혹에 무력했고 아담은 아내의 권함을 거절하지 못하였다. 이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를 위하여 주님은 누누이 강조하신 바,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눅 12:6-7).”
우리가 귀한 것은 우리로 귀히 여기시는 이의 뜻을 따라서이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그렇게 나는 점심때면 서둘러 식사를 하고 전화를 하여 성경과 일상의 소소한 질문을 하는 친구와의 교제가 귀하다. 어제는 뜬금없이 왜 또 올해에도 단기선교를 가라하였나? 하고 친구는 물었다. 작년에 한 번 다녀왔고 나름은 소중한 경험이었으나 굳이 왜 또 가야 하나 싶었던가보다. 몽골에 이어 올해는 라오스로 간다는데, 저는 양쪽 고관절이 자주 빠져 혹시나 화장실이 걱정이었다. 쭈그려 앉았다가 자칫 그러하고, 올해는 눈도 다시 침침하여 불안하기도 하여서 말이다. 그렇다고 마음에 내키지 않아 싫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저가 보고 듣는 것에 복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 마음은 보는 것과 같이 하는 것에 있기 마련이다.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과 서로 나누는 대화나 관심에서 자신의 마음이 머무는 곳을 볼 수 있다. 화요일 저녁이면 아이에게서 문자가 온다. 수요일 출근 전에 3, 40분 줌으로 성경공부를 하는데 한 주가 일고 묵상하던 가운데 머물던 성경구절 두세 곳을 보내기 위해서다.
하나는,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눅 1:20).” 하신 데 대해 궁금해 하였다. 이는 앞서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18).” 하면서,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13).” 하신 말씀에 대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의구심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어떻게 알리요… 나이가 많으니이다.’ 하는 마음으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두고 ‘어떻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사가랴는 증거를 요구하며 의심의 이유를 제시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18).” 이와 같은 추론은 합리적이다. 뒤에 이어지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같은 의문이 들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34).”
어찌 이 일이 가능하겠는가? 당시 레위인들은 50세가 넘으면 현직에서 물러나야 된다. 사가랴가 아직 현직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곧 물러날 때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이 소식을 전하는 천사는 ‘가브리엘’이다. 가브리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능력’이다. 가브리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이다. 또 한 천사 ‘미가엘’은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사단과 맞서 싸워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로 등장한다.
가브리엘은 지금 나이든 선지자 사가랴 앞에 섰다. ‘내가 비록 천사장이지만, 하나님 앞에 있는 자로 하나님의 명령만을 받아 수행하는 자이다.’ 하는 뜻으로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19).” 하고 설명하였는데도 저도 의심이 들었고, 이에 벙어리가 되어 침묵하게 하신 것이다. 분명히 ‘좋은 소식을 전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메시지를 전하다’, ‘선포하다’란 뜻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여기서 사가랴의 불신앙에 대하여,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20).”
믿지 않는데 따른 결과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다. 이를 전하는 데 있어서도… 아이의 다음 질문으로 이어서 생각하였다. 또 한 곳의 성경구절은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3:7-8).” 하는 부분이다.
무리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저들이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었을 것을 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또 다른 곳에서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요 1:19, 24).”여기서 저들을 ‘독사’ 곧 ‘뱀’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메시아를 대적하는 사탄을 의미한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시 58:3-5).
즉 메시아를 적대하는 자들로,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91:13).
이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을 맺어야 한다. 우리 안에 전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회개란 죄에 대한 단순한 고백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격의 변화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들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하는 데 대해, 이 ‘돌들로도…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하시며 회개 없는 실천은 어처구니없는 종교적 특권이고 의식에 따른 행위일 뿐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흙에서 취하셨다(창 2:7). 그래서 저들을 가리켜 ‘빈 들이나 강가의 돌들을 통하여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삼으실 수 있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랑으로 인내하시며 우리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를 원하신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이처럼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하나를 바랄 때,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그런데 오늘 뱀이 물을 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는 살짝 자신의 느낌을 섞어서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였다(창 3:2, 3). 분명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7).” 이를 확실히 들은 사람은 아담이다. 후에 여자를 지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18).”
우리의 생각이 ‘지나치게’ 의롭거나 악할 때 오히려 죄가 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그러므로 우리가 중심을 잡을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이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곧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6).”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나는 새삼 누구와 말씀을 나눌 때 나의 느낌이나 생각이 더해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자칫 우리의 간증이 말씀보다 앞설 때 스스로의 확신에 갇힌다. 그때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의도와 상관없이 미혹에 빠질 수 있다. 그렇게 오늘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7).” 부끄러움은 죄의 단면으로 하나님을 피해서 숨게 한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 이어지는 죄의 결과로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17).” 하여 사는 게 고달프다. 모든 질병과 고통이 따라왔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오직 주신 데 감사하고 오늘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2).
의지를 가지고,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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