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은혜를 입었더라

전봉석 2024. 7. 27. 03:24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8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1
 


 
때는 악하여 하나님이 근심하실 정도였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1-2).” 자신들 좋을 대로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3).”


 
결국 사람은 수명은 줄었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6-7).” 이 땅을 심판하실 것을 생각하셨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있었다.
 

돌아오는 9월에 인천 송도에서 <제 4회 로잔대회>가 열린다. 로잔은 스위스의 법적수도이다. 행정수도는 베른이다. 인구 8백만 명을 웃도는 정도의 작은 나라로 스위스는 중립국이며 연방제 국가이다. 쯔리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금융도시이고, 다보스에는 세계경제본부가 있다. 두 도시는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말세의 때에 나타나는 ‘두 짐승’을 연상케 한다. 그 사이에 있는 제네바는 칼빈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도시이다.
 

1974년 1차 종교대회가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고, 1989년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2차가 열리고, 2010년 남아공에서 3차 대회가 열렸다. 이번 2024년 9월에 4차 로잔대로가 인천송도에서 열리는 것으로 안다. 칼 바르트에 의해 20세기 새로운 복음주의가 확산되면서 복음주의 내에서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던 것이 ‘사회구원’을 포함시키면서 신정통주의 혹은 신복음주의가 확산되었다. 사회구원은 한 마디로 빈곤퇴치와 소수약자를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야 한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전역에 신정통주의가 확산되고 많은 신학교들이 이에 동조하면서 자유주의신학이 번져났고, 후천년주의, 무천년주의, 세대주의 등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었다. 결국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인류학을 비롯하여 철학과 모든 학문이 필요하다는 입장과 함께 성경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흐름이 기조를 이루기 시작했다. 창세기의 역사적 시간적 흐름을 부정하고, 노아홍수를 픽션으로 여기면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혼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천국이나 지옥의 개념을 무산시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를 실현한다는 주장으로 칼 바르트나 존 스타트의 현대신학이 기독교를 강타했다.
 

누가 WCC(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해 물었고 다원주의나 신정통주의 혹은 신사도주의에 대해, 그러다 이번에 열리는 ‘제 4회 로잔대회’에 대해 물었다.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사회구원을 내세우며 ‘성소수자의 인권’을 운운하며 지상의 낙원화를 꾀하려는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다. 2차 대회 때부턴가는 종교화합을 운운하며 기독교 내의 여려 교파는 물론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등 타종교까지 아우르는 사람 중심의 종교대회가 된 것으로 안다.
 

오늘 말씀을 다시 읽으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1-2).” 어떤 의미에서는 저들의 활동이 많은 지지를 받으며 굴지의 교회나 수많은 성도들로부터 환영을 받는 것도 이해가 된다. 빈곤층을 구제하고 소수의 약자를 배려하자는 운동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지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과 배치되고, 심지어 유대인들의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하는 성경을 배제하고 스스로 성경의 재해석을 운운하는 지경에까지 놓인 것은 가히 오늘 본문을 연상케 한다.
 

엄연히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이 서로 공존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녀는 서로 뒤섞여 산다. 이에 바울 사도는 기도하기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데 있어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해야 한다. 이에 더욱 자라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한 ‘진실하여’야 한다. 그렇게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우리의 <지식과 총명>은 세상의 학문으로 일그러지면서 스스로의 자구책을 찾아 스승을 여럿 두게 되었다. 교회 연합이니 종교화합이니 하면서 사람이 모여 운동을 벌이다보니 오늘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그렇게 나아가 하나님을 뒤로 하고 사람이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인류 공영의 역사적 사명을 띠면서, 바울 사도는 탄식하며 진술하였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9).”
 

신대원을 다닐 때 몇몇은 바르트의 사상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사회구원을 목표로 자신들의 목회 방향을 정하기도 하였다. 1886년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하여 개혁교회 목사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저의 신정통주의 사상은 폴 틸리히, 에밀 부루너, 루돌프 볼트만과 함께 개신교 신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여러 주를 중심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동성애를 합법화하였고, 개인복음보다 사회복음을 우선시하면서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는 데 사회 다문화 정책에 일조를 하게 되었다. 종교의 다변화에 발맞춰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쪽으로 많은 교단이 그 뜻을 같이 하고 있다.
 

누가 문득 물었던 것을 토대로 그 기원과 의미를 살피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4).” 놀라운 일이면서 또한 그럴 만도 한 게 굴지의 대형교회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장려하면서 저마다의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9-30).”
 

어제 저녁 가정예배를 드리면서도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내용으로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그 날에는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없는데,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3).” 혹여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하실 때가 그 날이 아닐까 하여 나는 두렵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 4:28-30).”
 

아닌 건 아닌 것이고, 틀린 건 틀린 것이다. 틀린 것을 다르다고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미명하에 복음주의는 신복음주의를 표방하고, 정통주의는 신정통주의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사회복음을 운운하면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인권이니, 존중이니 하는 차원에서 묵인하거나 방조, 아예 지지하거나 권장하는 입장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들’ 곧 셋의 후예들이 앞서 유리하는 가인의 후예들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의 딸들’을 그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3).” 우리는 엄연히 하나님의 상속자인 것을 망각하고 서로가 하나임을 운운하며 화합과 평화를 내세우는 것인지…. 오늘 말씀과 같이 노아가 노아인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
 

이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6-17).”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그 신앙을 온전히 지키는 데 있어서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18-20).”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

 
오늘의 우리 현실이 그러하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5-6).” 그러다 보니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7-8).”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지옥이니 형벌이니 심판과 같은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운운하며 성경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9).”
 

점점 더 대형교회로 모여드는 성도들에 비해 작은 교회들은 자립이 어렵고 개척교회는 낭망의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그런 점에서 더욱 열심히 성경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이에,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1).
 

어느 시대보다 어두운 밤 같다. 진리가 혼탁하고 복음이 뒤죽박죽 중구난방 읽힌다. 서로 읽고 이해하는 정도에서 자기 좋을 대로 취하거나 버린다. 그러할 때에,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2).
 

오히려 우리는 오직 예수, 오직 주만 바라야 한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