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창 10:19-20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시 138:7
우리의 날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기록이다. 우연 같으나 우연일 리 없고, 더러는 이해할 수 없이 부당하고 억울한 일에서도 주의 뜻은 선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홍수 이후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그런 가운데 함은 그 아비 노아의 하체를 드러냄으로 저주를 받았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22, 25).”
그런 가운데 약속의 땅 가나안이 함에게 속하였고, 동시에 소돔과 고모라 성도 그 안에 경계를 이루었다.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10:19-20).” 종종 우리는 악한 것을 선으로 바꾸시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놀란다.
어떤 일, 그 뜻하지 않은 일에서 주의 선하심을 바라는 게 복이다. 우리의 이해와 수긍은 나중 일이다. 당장은 그 뜻을 알 수 없을 때도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다는 기본 명제를 붙들고 선다. 일련의 교통사고와 그에 따른 일처리에 있어서 나는 또한 주의 도우심과 그의 인자하심 앞에 감사한다. 어제는 집 앞에 새로 생긴 병원에서 간단한 검사를 하고 물리치료를 받았다.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그러는 중에 새삼 감사와 찬송이 흘러나왔다. 어떤 일이 불운한 것 같으나 그것으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다.
오늘 본문에서 노아와 그 아들들로 각각의 민족을 이루는 가운데, 나뉘고,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10:5).” 언어와 나라와 지방을 구성하고,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20).” 각 족속과 나라가 형성되는 것을 본다. “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31).” 곧 우리의 문화와 지리와 언어와 혈통을 달리면서도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본다.
이를 바울은 아덴에서의 설교 중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6-27).” 곧 우리가 각기 자신들의 형편과 사정 속에서 사는 것 같으나 우리로 주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심이 귀하였다. 나는 엊그제 친구를 만나고 그리 전하며 감사하였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심’으로,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1, 9).”
어제는 점심 때 성경공부를 하다 친구가 물었다. 빚이 9천이 있는데 형편이 어려워 이자만 내고 있으면서 매 달 십일조를 드리고 헌금을 바치는 게 옳은가? 또 하나는 무슨 자격증을 딸 수 있는 나이제한이 이제 2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지금 이처럼 제자훈련 성경공부를 하며 시간을 쓰는 게 옳은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의 신앙이 허공을 딛고 선 게 아니라는 데서 우선은 감사하였다. 주께 우리로 ‘변화산’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현실로 이끌어 오시는 게 저의 고민으로도 증명이 되는 것 같아 감사하였다. 나는 친구에게 말하길 이미 그에 대한 답을 자신이 가지고 있으면 또한 자신이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알려주었다.
물질이나 시간을 내 것이라 여기는 한 그와 같은 마음은 수시로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 나의 모든 게 주의 것이고 주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실제 그 ‘시편’을 사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 때론 부당하고 어려워서 부정하고 싶겠으나 또한 우리 안에 그럴 수 없는 영이 함께 계심으로 괴로움으로 번민하는 것이다. 나는 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과 하나님과의 문제다. 생각해볼게, 하는 저의 대답을 기도하라고 정정하였다. 생각은 그 주도권이 내게 있고 기도는 그 주도권을 주께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6-27).”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누가 거역할 수 있겠나? 나는 나의 어려움으로 주의 사랑을 더욱 선명하게 본다.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확실하였다.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은 우리의 판단과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니다. 더러는 그래서 힘에 겹다. 내 뜻 같지 않은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기까지 우린 얼마나 우리 스스로의 이율배반적인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종종 생각하기를 멈춘다. 생각의 주도권은 내게 있다. 나의 주권을 포기할 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다. 생각하기는 행동하기를 미루게 한다. 순종을 거부하게 한다. 하나님의 뜻이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변화산에서 내려온 제자들이 제일 먼저 맞닥뜨려야 했던 일은 ‘귀신 들린 사람’이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하였으나 주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저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오셨다.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14-15).” 아, 이 지긋지긋한 현실의 한 가운데로 주는 우리를 이끄신다. 신앙은 허상을 딛는 게 아니라 현실을 딛고 나아간다. 믿음 생활은 낭만이 아니다.
이에,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시 37:34-36).
당장은 그 현실이 우릴 위협하는 것 같으나, 넘실거리는 요단을 딛고 설 때 넘치던 강물이 마른 땅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 그러므로 친구는 ‘생각해볼게’, 하는 말을 ‘기도할게’ 하는 대답으로 수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잠든 사이에 아이가 오늘 아침 성경공부 질문을 카톡으로 남겨두었다. 하나는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물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눅 5:10).” 이는 앞서 저들의 수고가 헛되었고, 이에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3-4).” 하시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산다. 이에 그 헛됨을 인정하면서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5).”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6).”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경험을 맛본다. 주의 은혜는 우리의 생각 그 이상의 것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그저 형이하학적인 데서 찾고 구현하려고 할 때 우리의 수고는 언제나 고달프다.
비로소 우리가 한 영혼을 주의 이름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능하였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우리가 주의 ‘거룩한 산’에서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8).” 이와 같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말은 서로가 아는 공통의 ‘인정하는 것’이 이루실 것이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우리가 바로 하나님을 알 때 ‘사회구원’이니 ‘지상낙원’이니 하는 허튼소리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신정통주의’니, ‘신복음주의’니 하는 소리에도 현혹되지 않는다. 저마다 종교화합을 부르짖으며 나름의 성경을 내세우며 복음의 재해석을 운운할 때,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 우린 오직 예수다. 저는 메시아 곧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가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4-5).”
이런저런 일들이 우릴 위협하나 그것으로 주가 이루시는 뜻은 선하시니,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사 14:26).” 우리가 주를 인정하는 데서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11:5).” 주가 이루신다. 이를 알 때 주를 인정하는 것이 나의 온 삶을 덮을 것이다.
아이의 두 번째 질문에서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결국 우리가 누리는 은혜의 값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데서 치러진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 곧 내가 주께 받은 게 얼마나 많은지, 주의 은혜가 내 생애 모든 면면의 순간마다 함께 하셨음을 인정하는 데서 그 사랑의 정도는 감당할 수 없이 크거나 애매하게 감사하다. 나는 어느 정도인지?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138:1).
나의 전심으로, 온 마음으로 과연 주께 감사하며 살고 있는지? 더러는 나의 수고와 노력이 이만하면 됐다고 여겨지는지? 그 시간과 물질과 건강과 모든 상황이 주의 것임을 전적으로 인정하며 살고 있는지? 그리하여 나는 나의 약함으로 더듬어 찾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안다. 알면 알수록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려함이라던 바울 사도의 고백에 아멘, 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에,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2).
하여,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3).
그러므로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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