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전봉석 2024. 8. 2. 02:32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3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시 140:7

 

 

성경을 신화적인 내용이 가미된 것이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설령 인정한다 해도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학이나 철학, 과학이 모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등비평이라 하여 시대적배경과 그 역사적 사실을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1세기 고대 근동을 기반으로 하는 배경을 이유로 성경의 재해석이 필요하다고도 한다. 특히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의 내용을 신화로 치부하려는 경우도 그래서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지낼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방관자적인 입장으로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다. 가령 나는 요즘 사고로 인한 자동차 수리로 렌트카를 타고 다닌다. 내 차보다 성능이 다양하고 운전석 앞으로 여러 가지 작동버튼이 있다. 하지만 나는 잠시 타는 것이라 받은 그대로 타고 다닐 뿐이다. 새로 무엇을 알려하거나 조작하려 하지 않는다. 무엇에 대해 관심도 없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은 나의 하나님으로, 내 평생에는 물론 영원토록 주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호 4:1-2).”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20).” 정작 모두가 하나님을 모른다, 하고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다고 하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1-23).”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리 살고 있다. 그러다 문득 삶에 지치고 너무 힘에 겨울 때면 스스로 결정을 한다. 친구는 엊그제 강릉에 사는 사촌형님의 장례식에 갔다 왔다고 하였다. 우리보다 겨우 서너 살 위인데 다들 쉬쉬 하면서도 실은 자살이라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어떤 사연으로 그리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은 그 주신 바 생명을 다하는 것이 주신 이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무도 새들도 심지어 땅을 지키는 돌들도 그 주신 바 자신의 생을 다한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은 항상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부르신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하고 시작하여,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하고 이르신다. 우리는 노아와 같이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먼저 찾아오시고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물으시고 말씀하신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6, 7).”

 

오늘 그 하나님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2).” 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알리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3).”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로 복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 곧 너를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사 45:3-4).”

 

친구는 마음이 심란하다며 그 속을 어찌 다 표현하지 못하고 어려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살이란 당사자의 일만이 아니라 남은 자들의 몫도 너무 크다. 이에 우리에게는 확실한 확답이 성경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우리의 정체성과 사는 이유와 목적이 모두 그 안에 있다. 부르심은 그 자리, 여태 머물고 있는 죄의 자리를 털고 떠나는 것이다. 저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은 우상의 땅으로 우상을 만들고 섬기던 곳이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수 24:2).” 예전에 내가 살던 곳으로 나의 삶의 목적과 이유가 있던 곳으로 죄의 자리이다. 더는 이를 돌아보지 않고 돌이킬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오늘을 살면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을 때 홀연히 사탄이 틈을 노린다. 안 믿는 사람으로는 그럴 수 있다 쳐도 믿는 자로 살다 어느 날 그와 같은 마음이 훅, 하고 끼쳐올 때… 이것이야말로 영적 전쟁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사람의 자유의지 가운데 가장 고상한 것이 스스로의 결정으로 자신의 목숨을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긴다. 내가 아는 아무개 의사는 실제 존엄사를 연구하며 점점 더 고령화시대를 살면서 이제는 더욱 자기 스스로의 결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각자 저마다의 행복추구권을 강조하면서 생의 결정까지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앞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 믿음을 지키며 살았는지 알게 한 후 오늘 우리의 삶이 결코 우리 스스로의 것이 아닌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저마다 자기연민에 빠져 자신만이 가장 어떠하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당장 곁에 더 힘들고 어려운 이가 있어도 자신의 기준과 잣대로 상대를 바라볼 뿐 누구도 저마다의 연민을 우선으로 알고 산다. 친구의 마음이 어려운 것에 대해서도 나는 여러 짐작을 할 뿐 뭐라 말하지 않았고, 대신 우리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그를 인정하는데서 모든 불행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깨달아 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4-15).”

 

더는 우리가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우릴 부르신 것은 복에 복을 더하시기 위함이다. 하여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이 놀라운 말씀을 따라 아브라함은 순종하였다. 이를 시편으로 찬송하고 간구하면,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시 140:7).

 

그야말로 하나님을 모르고 외면하고 살 때는 자살이 무슨 비상금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다. 흔히 하는 말 속에 ‘죽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이는 가당치않다. 엄연히 우리를 부르시고 오늘 여기에 두신 까닭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3-4).”

 

하여 우리로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 이는 모두가 같아서 하나 되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0).” 같은 하나님을 알고 같이 하나님을 섬기며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4).” 이에,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계 19:9-10).”

 

우리가 가장 귀하고 선한 것은 주를 찬송하는 것이다. 엊그제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경찰서에서 피해자 진술을 하면서도, 요즘 매일 물리치료를 받으며 고통을 달래면서도… ‘큰일 날 뻔 하셨습니다.’ 하는 저마다의 말속에 담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함께 하심이 새삼 귀하고 실감이 났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일을 당할 때, 왜 이런 일이? 하는 의문보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두고 되새기며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왜 하필 이런 일이 나에게?! 하고 갈등한들, 왜 그럼 안 되는가? 하는 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누군 더 끔찍한 사고를 겪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고 보면, 이 모든 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게 은혜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오늘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데서도 왜 하필 저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하여 저는 어떠하였는가? 하는 것으로,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 저는 그 나이에 말씀만 의지하여 길을 떠났다. 다소 무모하고 어리석은 결정이라 할 수 있는, 여태 적을 두고 의지하며 살았던 곳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난다는 게 어디 스스로의 결정이었겠나? 저의 이와 같은 순종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사 52:7-8).”

 

이는,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행 3:26).”

 

때론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두고 하나님의 선하심만을 붙들 때,

 

여호와여 악인에게서 나를 건지시며

포악한 자에게서 나를 보전하소서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을 꾀하고

싸우기 위하여 매일 모이오며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셀라)

(시 140:1-3).

 

실은 내 안의 여러 갈등과 생각들이 그러하였다. 그런 가운데,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포악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은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려 주셨나이다

(4, 7).

 

오직 주의 이름으로, 주님만을 의지하며,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진실로 의인들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들이 주의 앞에서 살리이다

(12-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