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전봉석 2024. 8. 3. 02:23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0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시 141:4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갔다가 기근이 일어 애굽으로 옮겨갔다. 그로 인해 아내와 저의 가정에 어려움을 겪을 뻔 하였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막으셨다. 그럴 때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우리와 함께 하셨다. 이를 깨닫고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1, 3-4).”

 

어느 순간 우린 그렇듯 죄에 이끌려 간다. 그러할 때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잠 14:16).” 같은 일을 겪으면서 누구는 주를 바라고 누구는 더욱 완고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1).” 살면서 사는 동안에 죄를 안 짓고 항상 주와 가까이 하면 좋겠는데, 수시로 드나드는 우리 안의 여러 생각이 혹은 남들을 따라 사는 무력감이 우리로 주를 멀리하게 한다. 안이하고 타성에 젖을 때,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을 때 하나님은 이를 깨닫게 하시려고 어느 뜻하지 않은 일을 공급하신다. 그럴 때면 우린 화들짝 놀라 주께로 다시 시선을 둔다. C. S. 루이스의 표현처럼 ‘고통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확성기’이다. 위험을 알리시는 큰 음성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일련의 사고를 겪으면서 그런 가운데서도 주가 함께 하셨고 이를 통하여 선을 이루심을 경험한다. 혹은 어떤 이의 어떤 일을 곁에서 목격하면서 주의 역사하심을 간접적으로 느끼기도 한다. 즉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이를 앎으로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러할 때 우린 항상 신앙의 회복을 경험한다. 물길을 따라 저절로 흘러가던 뱃길을 다시 거슬러 길을 튼다. 남방으로 가던 길을 벧엘로 바로 잡는다. 기근으로 애굽까지 흘러든 것은 방심하여서였거나 나름의 궁리였다. 그러나 다시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3-4).”

 

살다보면 우린 어느 순간에 그릇행하여 길을 잘못 든다. 이에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딤전 5:12).” 그렇게 누군 비즈니스선교를 운운하다 선교는 잃어버리고 사업가가 되고, 누군 잠시 신대원 학비를 준비하려 시작한 장사에 그대로 머물기도 했다.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경우도 있고 더러는 아예 부르심을 잃은 채 저 갈 길로 갔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가끔 그 일을 두고 서로는 말하길 어쩔 수 없는 사정을 들어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 말한다. 살면서 사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것을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까? 먹고 사는 일이 어찌 귀하지 아니하겠나? 그러나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이 주어진 바, 마음을 빼앗긴 게 무엇인지 돌이켜야 한다. 물질이든지, 가족이나 자녀이든지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전 5:13).” 그리하여,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6-18).”

 

지나치다함은 자신이 어찌하려는 모든 노력이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겸하여 할 수 있다고 자신할 때 길을 잃기 십상이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이에,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시 62:10).

 

그런데 이게 참 쉽지가 않다. 아브라함도 조카 롯도 저들이 부하여지자 잦은 다툼이 일었다. 하여 아브라함이 롯을 불러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창 13:8).” 하고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 할 때에 롯의 선택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11).” 왜냐하면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0).”

 

결국 그 보이는 게 전부였다. 결국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12).” 미처 우린 한 치 앞도 알지 못하고 당장 좋은 것으로 족하다고 한다. 없을 땐 몰랐던 것이 있고 보니 더 탐하는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앉았더니 눕고 싶고 누웠더니 자고 싶은 것이야 당연하겠으나….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34:14-15).

 

우리가 무얼 바라는가, 하는 것은 그 관심이 가는 곳에 눈길도 머무는 것과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악을 꾀하는 자리에 드는 것이어서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잠 12:20).” 그러므로 무엇을 바람보고 섰는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 그러할 때,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63:2).

 

어디에서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시각은 물론 판단과 기준도 관심과 생각도 그리로 통한다. 그런 점에서라도 나는 억지로라도 주 앞으로 이끌고, 말씀 앞으로 나를 앉힌다. 이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이에,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행여 롯과 같이 ‘육신의 안목’을 좇아갈 때 그의 최후는 우리가 익히 잘 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육신을 따라 사는 일은 순간이어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

 

이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3-14).”

 

그러므로 육신으로 사는 일과 영으로 사는 일을 따로 분리할 수는 없으나 같은 일을 하면서도 그의 영은 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의 사정이 그 형평을 알지 못하고, 말씀을 사랑한다 하면서 말씀을 전하는 이의 상황이나 여건에 관심이 없을 때 이를 과연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의 하나님, 나의 교회, 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 우린 얼마나 소속감을 가지고 내 것이라 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살고 있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수단인지, 목적인지! 누구에게 묻자 저는 관심 없어 하였다. 그래서 다시 묻기를 투자한 주식이라도 그처럼 무관심할 텐가? 하고 물었더니 답이 없었다.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대상 16:8).”

 

과연 우린 우리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알려 하는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를 위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에 마음이 어려워지는 것은 실제와 말씀이 다른 것이어서,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19:21, 22).”

 

쉽지 않은 일이다. 저마다 머리로는 안다. 거기까지만 알기를 원하고 정작 그 삶이 드려지는 데는 다소 엉거주춤하다. 어기적거리며 망설여진다. 듣기 좋은 말로, 유익한 시간으로 족한 것이지 정작 그리 살아야 하는 일이면 썩,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하실 때 이와 같은 말씀에는 좋아하면서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10).” 하시는 말씀 앞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직 아이들도 키워야 하고… 밭도 사고 소도 키워야 하는데,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친구는 종종 말씀을 삶에 적용할 때 와 닿지 않는다, 그럴 것 같지는 않다, 하는 소리로 자신의 실천을 미루고는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그러므로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그것으로의 삶이다.

 

우린 할 수 없으나 우리로 하게 하시는 이가 말씀하시길,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에,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20-22).”

 

우린 다만 믿음으로 산다. 현실의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141:1-2).

 

오직 주를 바람으로,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 두지 마옵소서

나를 지키사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