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전봉석 2024. 8. 4. 02:4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 14:18-20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시 142:7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용트림을 하듯 난리다. 그러다 이런저런 일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마치 ‘이제 어쩔래?’ 하고 묻는 것처럼 우리의 가는 길을 눌러 앉히려는 것 같다. ‘그래도 갈래?’ 하고 묻는 일들 앞에서, 오늘 아브라함과 같이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주변국의 소용돌이에 소돔에 살던 롯이 해를 입었다. 이를 두고 베드로는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후 2:7).” 하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롯을 두고 의롭다하기 어렵겠는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저가 아브라함을 따라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온 것만으로 그리 여겨주시는 것이다.

 

주변국에 의해 사로잡힌 롯을 구하고 돌아오던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 자신이 취한 것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 멜기섹덱은 제사장이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히 7:1).” 이에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6:20).” 하고 설명하고 있다.

 

앞서 여러 주변국의 정세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세상을 좇으면 세상과 함께 휩쓸린다.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창 14:12).” 공교롭게도 일이 그렇게 됐다. 저들은 악하고 큰 죄인들이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단호하심으로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사 13:11-12).”

 

반드시 심판의 때가 따를 것이다. 이에 세상을 가까이함을 두고 간음하는 것이라 하셨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이 간단하고 분명한 사실 앞에서도 우린 더러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긴다. 예수께서 이르시길,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하여,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이와 같은 성경의 진리 앞에 저마다의 이유와 사연으로 달리 해석하려 한다. 노골적으로 누구는 말하길 타고 다니는 차의 배기량과 목회의 성공은 비례한다고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성도의 숫자나 교회의 규모가 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그러므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하시는 말씀 앞에서 우린 얼마나 군더더기 없이 이와 같은 사실 앞에 아멘, 할 수 있을까? 덧붙여 설명해야 하는 말이 많은 경우, 변명하는 자가 그 속에 자신의 부끄러움을 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롯의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요즘은 서로가 너무 적당한 거리에서 친절한 타인으로나 지내기를 바라는 터라, 이웃을 사랑하는 말씀이 다소 무색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우린 과연 주님의 친구인가? 내 곁의 한 영혼을 두고 마음으로 깊이 위하는 친구이고 사랑하는지? 더는 서로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는 세상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달라졌다 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는 마음은 동일하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그렇듯 교회를 섬기고 서로 하나 되는 것이 희박해졌다. 어릴 적 아버지의 목회 현장에서 보면 늘 가족 이상으로 가까이하던 가정이 늘 있었다. 심지어 같이 옮겨가고 같이 머물면서 교회를 지키던 성도의 가정도 있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을 섬기고 의뢰하는 만큼 주의 종을 섬기는 것이었겠다. 요즘에 ‘목사’는 일개 직업의 하나로 여겨질 따름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섬기는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이 귀할 때가 있다. 가령 친구이나 저가 내게 건네는 헌금이나 마음 씀이 단지 친구를 대하는 것 이상이란 걸 안다. 누구는 매월 언제 자신의 월급통장에서 얼마씩 자동이체로 헌금을 보내기도 한다.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나를 귀히 여겨주는 데 있어, 나는 송구하나 주의 이름으로 저를 위해 기도한다. 곧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섬기는 일은 그 일을 감당한다고 여길 때 상대를 높일 수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스스로 나는 할 수 없으나 그때마다 주의 손길이 교회를 이어가고 계심을 나는 항상 피부로 접한다. 더러는 어떤 뜻하지 않는 일이 걸림이 될 때도, 그런데도 계속할래? 하고 묻는 것 같아 나는 기꺼이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충성을 다한다. 일련의 사고를 당하고 새벽시간에 운전을 하고 교회로 오는 일에 있어서 나는 그저 묵묵히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는 내 의지로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주를 섬기며 주와 함께 가는 길이란, 더러는 의심이 들고 회의와 갈등이 나를 엄습하기도 하지만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결국은 믿음으로였다. 믿음의 증명은 행함으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이와 같은 믿음으로 이 길을 간다. 믿음의 의지는 죽으나 사나 주의 것으로 드려지는 일이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두려움도 이긴다. 아브라함은 저들 주변국의 연합군에 맞서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쫓아갔다. 모든 면에서 상대가 안 된다. 이런 가운데 어떻게 교회를 이뤄갈까? 할 때 주가 하시는 일이 선명해진다. 내가 스스로 여력이 될 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희미하게 여겨진다. 그러므로 말씀은 이르시길,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신 31:6).” 이를 붙들고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른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7).”

 

말씀 없이 우린 무엇으로 힘을 얻을 수 있을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6-17).”

 

우리가 주를 바라고, 주만 의지할 때,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2-3).”

 

이와 같은 말씀으로 오늘도 오늘만큼의 길을 간다. 주와 함께 간다. 내 곁의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한다. 나의 어리석고 나약한 마음과 육신을 주 앞에 내어놓는다. 이에,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사 12:4-5).”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다.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늘을 두신 데는 주의 뜻이 있으시다. 이를 붙드는 순수한 마음으로만 신앙을 담는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이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어느 훗날 멜기세덱 되시는 주님께서 우릴 맞아주실 것이다. 마치 아직 상거가 먼데 아버지께서 먼저 달려와 나를 감싸안으시는 것처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 2:26-27).” 하시고,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28).” 이 놀라운 영광을 바라보며…….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그저 묵묵히 또한 무던하게 한 길 가는 순례자로 오늘도 주 앞에 나왔다. 나는 미천하고 보잘것없으나 내가 받은 은혜가 귀하고 너무 커서,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5-7).” 우리로 서로 받으라 하심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그러므로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시 142:1, 3).

 

그리하여,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4-5).

 

이에,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6-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