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전봉석 2024. 8. 8. 02:17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4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 147:10-11

 

 

백세가 다 된 아브라함이 세 사람을 보고 영접한다. 저들은 하나님의 천사들로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다. 우리 생각에는 불가능한 일이겠으나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키신다. 이를 알고 영접하여 함께 보는 것이 귀하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우리 삶 속에 주의 영광이 함께 하심에 대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이 놀라운 봄과 들음으로 우리에게 복이 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이를 우리가 듣고 보고 알았다는 것에 은혜이다. 그러므로 한 날의 삶이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버려지는 게 아니다. 나는 나의 육신의 연약함으로 주를 바란다. 어디가 아프다는 일, 때론 이 일이 외롭고 지루하여 주의 이름을 부른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 나의 차례를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어떤 이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몸을 간신히 가누며 진료실로 들어간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거칠거나 시무룩하거나 지루한 얼굴로 자기 순서를 기다린다. 나는 핸드폰으로 설교원고 마무리 내용을 다시 읽고, 아침에 썼던 묵상글을 다시 읽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누구를 보았을 때 서로의 이질감이 든다. 다른 세계 어느 시간에 앉아 있는 것 같다. 오늘 시인의 표현 중에서,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시 147:20).

 

그리하여 어느 특별한, 이를 알고 바라고 구하게 하시는 게 서로 다르다. 나는 나의 약함으로 주를 바란다. 진통제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를 받고 집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몰려드는 피로감으로 간신히 가정예배를 드리고 잠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6-8).”

 

주어진 상황에서 주를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데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로써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우리로 이를 알고 인정하게 하심이 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아이와 출근 전에 줌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일어서는데, 문 앞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휴가인 줄 모르고 출근을 했다며 ‘아이’는 핸드폰 배터리도 방전된 채 교회로 왔다. 청귤청을 한 잔 내주고 오전시간 아이와의 이런저런 대화를 가졌다. 어떤 말은 무슨 의미로 이를 말하거나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린 우리에게 맡기신 일로 ‘그 일들’을 감당한다. 우리는 어느 시절보다 은혜의 시간을 산다. 이를 이사야는 감사하며 찬송하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사 12:1).”

 

아이들과의 성경공부나 대화에서 내게 더하신 이 일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사고로 인한 것인지 본래도 그런 것인지, 어제는 유난히 몸이 무겁고 아팠다. 속이 볶일까봐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때로는 견디는 게 일이다. 아픈 게 일이어서 그런 가운데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나의 일을 한다.

 

겸손히 주를 섬긴다는 일은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6).” 묵묵히 그저 무던하게 하루하루 산다는 일,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그러므로 주를 바라며 산다는 것은 하루씩 더 겸손하여지는 일이다.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것,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잠 22:9).”

 

그리하여 심령은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며, 긍휼히 여기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6-10).”

 

오늘을 사는 데 있어 천국이 나의 것이라는 말씀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그럴 수 없는 상황과 여건에서 주신 바 한 날의 수고도 복되다. 이에 우린 능치 못할 게 없으신 하나님을 마주한다.

 

오늘 사라는 웃었다. 남편도 자신도 나이가 많이 들어 더는 불가능한 일을 두고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1-12).” 당연히 우린 현실을 보고 주의 말씀 앞에 의문이 든다. 말씀은 우리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다만 이를 알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하시고(13),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4).”

 

하나님은 기어이 약속을 이루신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 그 약속의 말씀을 이루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고백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

 

때론 여러 시간이 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기도 하면서, 고난으로 순종을 배운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곧,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115:3).

 

오직 하나님은 행하신다. 그러는 데 있어 우리의 이해를 구하지 않으신다. 때로는 그 시간까지 침묵하신다. 사울이 바울되고 22년이 지나서야 로마서의 그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데 있어 하나님의 13년의 침묵을 견디게 하셨다. 하나님의 때를 우린 알 수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하시면서도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7-8).” 주는 행하신다. 다만 주의 약속을 행하신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더러는 이를 알지 못하고, 그때가 돼서야 알 수 있으나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이와 같이 우리로 알고, 하나 되어, 주를 찬송하게 하시려고….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2-3).”

 

아프고 힘들 때, 외롭고 힘에 겨울 때 오히려 우리들로 하여금 주를 바라게 하심인데…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1-42).”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보지 못한 것을 취할 때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때론 이 일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아이와의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와 갈등이 들 때도 묵묵히 주를 생각함으로 감당하는 것이었으니,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39:7, 42:5).

 

이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주를 앙망함으로 주어진 생을 다한다. 가끔은 아흔의 연로한 육신으로 힘에 겨워하며 숨을 몰아쉬면서도 찬송을 하고 성경을 같이 읽는 늙으신 장모 곁에서 나는 은혜를 받는다. 생을 다한다는 일은 그리하여 숭고하다. 늘 다리는 붓고 시리고 아프다.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보행기에 몸을 얹고 걸음을 떼는 그 삶의 고단함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주가 주신 한 날의 생을 다하는 일,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사 57:11).”

 

한 날의 수고로 족한 날을 사는 것, 오늘도 이처럼 말씀 앞에 앉히고 기도로 하루를 맞이하는 일. 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주신 바 그 현실 속에서 주를 의뢰함이었으니,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25:14).

 

이를 붙들고 오늘도 ‘시편’ 속으로 뛰어들어 시편을 산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147:1).

 

이를 아멘으로 화답할 때,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2-4).

 

이 놀라운 은혜를 살면서,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7, 10-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