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창 16:12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시 144:11
가나안으로 온 지 십년이 다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자기 여종 하갈을 준다. 대신하여 아이를 출산하고, 이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이루려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와 같은 생각과 그 마음이 주의 뜻을 헤아리고 따르려는 것 같다. 흔히 현대신학을 뒤덮고 있는 게 이와 같은 나름의 방안이다. 신사도주의니, 신복음주의니, 신정통주의니 하는 것들이 모두 나름의 노력에 따른 자구책이다. 이를 위해 ‘초등학문’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분석하려 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갈 4:3).” 이를 발판으로 하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9).” 여전히 말씀을 이해하고 묵상하는 데 있어 우리의 지식과 상식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다보니 성경에 대해서는 신화와 고대근동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하고, 하나님을 철학에서 말하는 전적인 타자, 피조물과 다른 존재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경계하길,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이미 대부분의 신학교는 일반대학과 다를 게 없고,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대원에서조차 일반학문을 우선으로 하여 성경으로의 접근을 유도한다. 그 한계를 각종 은사니 영성이니 하는 성령운동으로 포장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경험한다 하는 것은 어떤 느낌을 따르는 것으로 감정이나 상상, 꿈으로의 환상을 포함한다.
오늘 사라가 보여주는 나름의 방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일을 알아서 하려는 데 따른 선택이다. 이를 아브라함은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 일대는 전쟁과 전쟁이 끝이 없다. 그 까닭은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창 16:12).” 결국 사람의 후손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르시길,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 세대는 하나님을 자유하신 분이라 하여 주전 2천 년 전 아브라함과의 약속은 그때 그 일로 치부한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얽매이지 않으심으로 모든 시대에 자유하시고, 그 언약은 언제나 유동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이 땅의 사고와 철학과 이해와 상식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어쩌면 우린 너무 오랜 시간을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며 산다. 이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16).” 하는 것은 세상이 너무 빠르게 부풀려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여기서 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갖다 넣은 여자는 ‘악한 존재’이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 2:20).”
또는 음녀로 지칭된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계 17:1),” 이에 가루 서 말은 교회의 순수성으로 여기에 ‘누룩’을 넣어 부풀려서 순간 복음을 변질시켜 신복음주의를 운운하는 새로운 복음사조로 온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외적으로는 성장을 가져오나 가루 서 말 곧 많은 양의 가루를 부풀려놓았다.
결국 사라는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이 괴로움을 당한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창 16:4).” 곧 약속의 말씀을 벗어난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은 스스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오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규례와 법도를 행하라고 네게 명령하시나니 그런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지켜 행하라(신 26:16).” 곧 나의 기준과 판단으로가 아니라 끝까지 인내하고 더 좋은 것으로 예비하신 하나님을 바람으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 40:8).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고백 안에서 이루어져 간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잠 1:31).” 수많은 사람들이 이끌리고 휩쓸리는 곳에는 그런저런 타당한 논리와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으로의 신복음주의가 주목을 끈다. 그러므로 지혜는 이르길,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말씀을 듣는다는 것, 이는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이에 물들어 그 삶이 말씀 안에 거하는 것으로,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78:1-3).
구약을 배제하거나 축소하려는 생각도, 신약만을 강조하거나 또는 그 반대이거나… 우리의 신학이란 게 얼마나 취약한가? 하여 더욱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는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아담도 그 아내 하와가 건네는 산악과에 대하여 어찌 판단하지 못했을? 오늘 아브라함 역시 사라가 제시하는 그 몸종 하갈에게서 약속의 씨를 얻으려고 취하기에 앞서 옳은가 그른가 어찌 판단하지 못했을까? 우린 너무 어리석다. 이는 스스로의 판단과 기준으로 말씀을 또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 한다. 누구의 말에 혹하고, 금세 사람들에 휩쓸려 끌려 다닌다. 결국은 교만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여,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이 간단명료한 진리 앞에 우린 자꾸 덧씌운다. 자신의 이해와 호기심을 덧입히고 이를 충족하게 할만한 여러 소리에 귀가 가렵다. 그러나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우린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 말씀을 품고 살아야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늘 우리 가운데 계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런 점에서도 나는 나의 묵상이나 어느 구절, 혹은 단어 하나에서 ‘어떤 느낌’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성경 전체를 살핀다. 한 구절, 한 단어를 놓고 여러 말씀을 근거로 성경을 따라가려 한다.
점점 현대사회가 그러하듯 성경 묵상을 큐티라 하여 간소화되고 한두 구절, 혹은 어떤 어절이나 단어를 놓고 삶에 적용하거나 그 느낌을 따라 성령의 감동을 운운할까 두렵다. 또는 성경을 성경으로 읽기보다 누가, 어떤 사연을 가지고 간증하거나 어떤 사건을 들어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에 주의한다. 예화나 비유가 말씀을 덮지 못하도록 한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느낌이 말씀을 따르지 않고 말씀을 이끌어갈까 하여 경계한다. 이처럼 나의 묵상글의 대부분을 성경구절로 찾아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13:23).”
말씀이 나를 이끄실 때 욥의 놀라운 고백과 같이,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여 나는 늘 나를 돌아보아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사 59:12).” 나의 이해가 또는 판단이 말씀 없이는 부질없으며 거짓된 것을 인정함으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늘 조심 또 삼가 말씀에 앞서 나의 감정이나 느낌이 나를 주도할까 하여 주의한다. 행여,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2).”
은연중에 나는 얼마나 생각 없이 ‘사라의 권함’을 따르고 ‘하와의 건넴’을 주저함 없이 받아 삼키고는 하는지! 결국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나는 이와 같은 말씀에서 안도한다. 행여 그릇행할까 하여 두려워하다가도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하나님은 우리의 악함까지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심을 인정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러 바울의 고백이 내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설령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주께 아뢰겠다는 욥과 같이, 이제는 사나 죽으나 나의 보잘것없는 부분까지도 주의 것이어서 얼마나 감사하고 또 다행인지…. 시대가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7).
그렇게 나를 또 돌아보며, 새로운 한 날을 놓고 아뢰기를,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144:2).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9).
하면,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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