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전봉석 2024. 8. 7. 02:39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 17:5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 146:1

 

 

‘아브람’이 ‘아브라함’이라 부르심을 받는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고(32:27,28), ‘시몬’에게 ‘베드로’란 이름을 주신 것과 같다(요1:42).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우리에게 새 언약과 함께 새 이름을 주신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 2:17).”

 

우리가 받은 새 이름은 성도요, 그리스도인이다. 직접적으로는 전의 나와 오늘의 나는 전혀 다른 약속 위에서 산다. 이는 새 언약과 같아서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5).”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은 그 소속과 정체성이 전혀 다른 신분으로의 삶이 부여된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은 우릴 잊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신다.

 

아브라함은 앞서 다메섹에서 데려온 엘리에셀을 그 후손으로 삼으려 했다가 이번에는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을 약속의 씨로 삼으려고 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 그 이유는 자신과 아내 사라의 나이를 생각하여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17).”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오늘 말씀에서 완전하라 하신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

 

우리가 주의 말씀 앞에서 완전하기란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이겠다. 분명 말씀은 앞서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2-4).”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그래서 타당한 방식으로 엘리에셀을 세우거나 자의적으로 이스마엘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9).”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허를 찌르신다. 예상 밖의 일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신다. 이를 우리 이해와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으로 따르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이처럼 우린 어리석게도 우리의 한계와 그 범위 안에 하나님의 역사를 가두려고 한다.

 

오늘 아브라함이 그러했던 것도 저가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사라가 권하여 하갈을 취하고 이에 결국 아들을 얻는 것에 따라 하나님의 침묵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되새기게 하셨다. 더러는 우리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침묵이 있을 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거나 단절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4-15).”

 

살면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마치 그 부모가 어린 예수를 잃어버리고 사흘 길을 갔다가 돌아와 회당에서 다시 찾은 것처럼, 이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우린 그렇게 허튼 데 정신이 팔려 이 귀한 말씀을 잃어버리고 살고는 한다. 말씀을 잃는 것은 약속을 잊고 사는 것이다. 하여 우리가 받은 이 귀한 부르심의 사명을 어디서 잃어버린 것인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하여,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 5:15).”

 

오늘을 살면서 내가 내 안에 주를 모시고 주를 바라며 주께 대한 믿음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크고 귀한 일인지를 알 때,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이 놀랍고 귀한 것이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님을 명심할 때, 오늘 날 모든 신학과 신앙을 뒤덮고 있는 ‘자기 노력의 자기 의’를 따라 사는 일은 어리석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임의로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세우듯 성경을 재해석한다거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기보다 신화로 학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다를 게 없다. 저들이 임의로 ‘하갈의 이스마엘’을 약속의 씨로 삼는 것 같이 와 닿지 않는 내세나 천국보다 오늘 이 사회를 낙원화하여 사회구원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적인 발상이 현실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영혼은 결국 소멸되는 것이라 하며, 만인 구원설을 주장한다.

 

이는 바티칸에서부터 다원주의를 수용하면서 오늘 날 복음주의라 하는 교회들도 성경의 7천년의 역사를 인정하지 못하고, 창조와 홍수심판 등을 신화적인 요소로 본다. 실제 미국의 어느 복음주의 목사는 강단에서 동성애가 성경적이지 않고, 죄인 것을 설교하여 1년 실형을 살기도 했다고 한다. 이제 더는 구원론이 모든 종교를 아우르고, 기독론은 신성을 인정하되 사람 예수가 성자가 되어 성인이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처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사실은 상징이며 은유라고 이해한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아브라함이 그러했듯이 저의 ‘엘리에셀’이나 ‘이스마엘’이 ‘이삭’을 대체한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은 13년 동안 침묵하시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완전하라’ 명하신다. 이는 ‘내 앞에서 행하라’ 하시는 말씀으로 우리의 완전함이 어찌 가능할 수 있는지 알게 하신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곧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를 완전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완전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행함으로 가능한데,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16:8).

 

하여 우리는 저마다의 하루를 주 앞에서 행한다. 기를 쓰고 말씀 앞에 앉히는 것도, 기력이 없어 쓰러질 것 같은데도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으로 사력을 다하는 것이다. 우린 그렇게 완전해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 부여하신 명령이시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

 

처음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정복하고 다스리지 못할 때 저들에게 우리가 정복당하고 다스림을 받게 된다. 하여,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그럼에도 우린 얼마나 무기력하게 자신을 내어주듯 자신들만의 ‘엘리에셀’을 세우거나 ‘이스마엘’로 대체하고 약속의 말씀을 저버리곤 하는지…. 그러므로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곧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그런 점에서 나는 늘 나의 나 된 점에서 주의 도우심을 구한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나의 감정이 또는 상한 마음이 욱, 하고 치밀어 허튼소리를 하거나 진리 아닌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는 하는지….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돌아서기 무섭게 다스릴 수 없는 마음이 허튼소리로 나를 사로잡곤 한다. 그럴 때 나는 나의 나 됨을 인정하면서 정해진 가정예배를 드리고, 일찍 눈을 뜨면 찬물로 세수하고 교회로 나온다. 말씀 앞에 나를 앉히고 습관처럼 주어진 한 날을 주 앞에 놓는다. 부디 그리하여,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잠시 길을 잃으면 너무 먼 길을 돌아야 한다. 이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그야말로 아차, 하는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럴 때 나를 붙드는 한 가지는 아이와의 성경공부로 저녁께 아이가 성경구절을 남겼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 8:16).”

 

등불은 우리에게 명하신 사명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를 우리가 ‘그릇으로 덮듯’ 또는 ‘평상 아래에 두듯’ 덮거나 아래에 두지 않는다.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으면 그 빛은 아무 곳도 비출 수 없고, 곧 공기가 없어 꺼지기도 한다. 혹은 평상 아래에 두면 등불을 켜서 밝힌 의미가 없다. 결국 우리의 사명은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하심과 같이 ‘숨겨진 것’을 드러내야 하고, 그 ‘진리의 말씀이 장차 드러날 말씀’임을 알게 한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또 하나의 구절은,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1-62).”

 

이를 앞의 말씀과 연관 지으면, 우리의 쓰임에 합당한 자들로 ‘먼저’와 ‘나중’을 분별해야 한다.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에서,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입맞춤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왕상 19:19-20).”

 

이에 따른 예수님의 대답은 ‘손에 쟁기를 들고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다. 손에 쟁기를 들고 있는 목적은 밭에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다. 해야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된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 우리가 손에 쟁기를 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다. 일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하여,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와 같이 나는 누구의 일상에서, 혹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설명할 때, 오늘의 나를 돌아보고 이 시대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며 저들로 인하여서도 주를 더욱 바라게 된다. 부디 나의 허튼소리로 말씀이 와전되지 않기를… 그리하여 항상 깨어 기도하고 말씀 앞에 앉힘으로 주 앞에서 행할 때 완전하기를.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146:1-3).

 

이 일에 있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3-4).

 

세상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8-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