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 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 30:22-24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시 9:10
야곱의 두 아내와 두 여종이 경쟁하듯 아이를 출산한다. 서로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시기와 질투를 거둘 수 없다. 이러한 우리의 허물까지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시며 훗날에 저들의 후손들로 12지파를 삼아 하나님의 선민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와 같이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능가하신다. 주의 뜻은 우리의 연약함과 상관없이 성취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 25:1).”
이와 같은 사실 앞에 우리의 모든 오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을 본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나의 모난 점과 잘못까지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신다. 그것으로 우린 더욱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고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인정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여러 명의 아내나 그 자식들이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 관계란 각자의 몫이다.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이 레아를 거두게 하였고 저 둘의 경쟁적인 사랑 욕구가 두 여종을 앞세우면서까지 중혼을 촉발하였다. 마음은 시달리는 갈대 같아서 작은 바람에도 쉬 흔들린다. 더욱이 우리가 자신하는 사랑이란 게 마음의 일이라, 그땐 그게 옳았다가 이제는 아닐 수 있는 게 우리의 사랑이다.
전에 누가 안 믿는 신랑과 두 아이를 두고 너무 사랑하여서 자기 혼자 천국에 들어가느니 사랑하는 가족들과 지옥에 가는 게 낫다는 소릴 하며 주일을 지키며 교회를 다니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때는 뭐라 이른들 저이는 자신의 사랑을 확신하였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 부친상을 당하고 또 얼마가 지나 저는 혼자 친정엄마와 산다며 안부를 전했다. 그처럼 영원할 줄 알았던 신랑과는 이혼을 했고, 아들은 남편이 딸은 자신과 생활한다며 쓸쓸한 소식을 전하였다. 그 사연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실제 저의 잃어버린 세월이 단지 사람과 사람의 사랑뿐인가? 하는 생각을 종종하게 된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 5:18).”
한 가정을 이뤄 서로가 한 몸 이뤄 사는 일이 귀하다. 하여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전 7:3).” 때로는 여러 마음이 서로 뒤엉겨 그릇 행하게 하나,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또는 그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 같이 여겨 지식을 따라 동거하고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7-9).”
성경의 이와 같은 지침은 우리가 사는 데 있어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데 막힘이 없고자 하심이다.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다보니 어떤 날은 아내와 다퉜거나 서로 감정이 상했을 때는 그 짧은 예배도 얼마나 서먹하고 어려운지 모른다. 성경을 읽고 잠시 그 내용을 풀어 설명할 때에 머쓱하고 민망한 마음으로 제대로 예배가 안 된다.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저해한다. 내 안에 미움이나 시기가 있을 때 주께 드리는 예배가 어렵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
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시 37:1-2).
우리의 하찮은 듯 한 감정의 문제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누굴 마음에 두어 지나치게 사랑하는 일도 미워하는 일도 모두가 실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있어 더욱 심각하다. 이에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음으로 날마다 매순간 확증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서로 그 마음이 아무리 선하다고 한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 23:17).” 자칫 눈에 보이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에 혹하여 일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이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살면서 어쩌다가 주의 사랑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마다 그럴 수 없는 이유를 목에 걸고 살지만 그것으로 자신이 이고 지고 가는 세월이 참으로 고단하기도 하다.
누군 이혼 후에도 저에 대한 미움과 억울함으로 십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달린다. 용서할 수 없는 만큼 자신이 받은 은총도 미미할 따름이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6).” 그러니 하나님보다 우선하거나 더 사랑하는 것들은 그것으로 우릴 짓누르기 마련이다. 나름은 정당하고 옳다고 하나,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흘리고 산다.
라오스로 선교를 다녀온 친구는 이런저런 체험과 함께 다소 아쉬웠던 점을 말하였다. 어찌 됐든 나는 저에게 갈 수 있고, 할 수 있는 상황이면 앞으로도 마다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분명 저의 말처럼 자신의 신앙에 도전이 되고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동도 더하시는데, 저는 여전히 크게 와 닿지 않는 자신의 무심함이 아쉬웠다. 어찌 그런가? 하고 물어서 나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먼저 위하는 게 많은가보다, 하고 말을 던졌다. 누구는 함께 할 수 없는 형편을 아쉬워하며 백여만 원이 넘는 일체의 선교경비를 헌금으로나마 바쳤다며 그런 마음을 신기하게 여겼다. 진정 그 마음의 중심이 문제겠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자칫 자신은 괜찮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교만은 대단한 게 아니라, 스스로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허용의 범주다. 그러므로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우린 우리 주변의 여러 환경과 사건으로도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친구는 같이 갔던 이들 가운데 평소 교회에서 깊은 교류가 없어서 몰랐는데 어떤 이는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었고, 어떤 이는 간경화를 앓고 있는 이도 있었다. 어쩐지… 하고 저들의 헌신과 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스스로도 그로 인하여 주를 더욱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은 그것으로 사는 데 따른 억척스러움과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을 더 바라고 구하며 살았던 것 같다고 하였다. 더러 ‘고통이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말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약 1:14-16).”
누구보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자신이지 않을까? 가장 자주 속아 넘어가면서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도 스스로에 대한 타성에 젖어서이다. 그럴 수 있지, 하고 자신을 허용할 때 그 마음으로 온갖 것들이 드나든다. 이에 우린 자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이는 예수께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하고 말씀하신 것도 어린 아이의 특성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자라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 10:15).” 순전한 마음으로 들은 말씀을 받아 천국을 사모함으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이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살전 4:3-6).” 주의 거룩하심으로 우릴 위해 신원하여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산다.
더러는,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교만은 이와 같이 에이, 설마! 하는 가벼운 마음에 깃든다. 이에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그렇게 죄에 대하여 우리가 무심한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2-23).”
그러므로 주신 상황 속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이에 오늘의 소망은 또 한 날의 하나님의 나라로 채워지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도 우린 우리 곁의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오늘 말씀에서 경쟁적으로 야곱을 사랑하고 그에 따라 역설적이게도 자식들을 낳았고, 비로소 야곱이 자신에게 부여된 한 민족을 구성하는 과정이었다. 주가 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4-25).” 이를 야곱은 일러,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창 30:29-30).”
하여,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22:3-5).
우리가 주를 바람은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사 50:7).” 이를 알고 확신함으로,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9:1-2, 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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