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전봉석 2024. 8. 21. 03:04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창 31:24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시 10:12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여 생활한지 20년이 흘렀다. 서로 좋게 헤어지면 좋을 텐데, 사람과 사람 사이가 그게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그것으로도 우린 어디에서든 세상에 소망을 가지면 안 된다. 이에 하나님은 명하셨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창 31:3).”

 

물론 또 안주하고 정착하던 곳을 떠난다는 게 쉽지 않다. 형 에서를 피하여 빈손으로 왔다가 네 명의 아내와 열두 명의 자녀와 가신들과 가축들이 풍부하여 돌아가야 한다. 야곱에게 아람은 우리에게 이 땅의 생활과 같다. 우린 모두 잠시 머물다 가야 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풍요와 모든 안락함은 잠시뿐으로 놓아두고 갈 것이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하여 세상에 두지 말라 하심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이 땅의 모든 것이 잠시 있다 없을 것이다. 나는 아흔의 장모와 같이 살면서 그 세월의 기구함에 놀라고, 오늘의 고단한 육신을 이끌고 살아내는 일이 경이롭다. 거동이 불편하긴 하나 혼자 움직이기는 하는데, 욕창이 나서 요즘은 아내의 수고가 두 배다. 더욱이 나이가 들면 고집도 완고해지는 것이라 매일 아내와 장모의 적잖은 시시비비가 끊이질 않는다. 나는 지금의 내 육신을 이끌고 저만치 30년은 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까마득하다. 이에,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마음에 어디에 두고 살 것인지, 얼마큼씩 어딜 바라보고 살 것인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이러한 말씀으로 매일 새롭게 초점을 맞춘다. 어차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은 여느 안 믿는 자들이 세상을 구하고 바라는 것과 달라서, 세상으로부터 오는 시기와 질투를 받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악이 있기 마련이다. 어떠하든지 모든 사람의 결국은 같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 9:3).”

 

그 속의 것은,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

 

이유는 뚜렷하여서,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서인가? 하나님이 그런 저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심인가? 그런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소속을 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그리하여 오늘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이나 그 삶의 무게도 이유도 안다. 그런 우리에게 주가 이르시길,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당하는 어떤 어려움은 주로 인함이다. 주를 사랑하고 온전히 주를 섬기려할 때 생의 어려움은 가중된다. 사람들의 몰이해는 공격적이다. 삼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이 그러하여 야곱을 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창 31:24).” 하나님이 저를 막으셨다. 저도 이를 실토한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29).” 그러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온전히 주를 섬기는 데 있어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일주일간 선교를 갔다 토요일에 돌아오고 평상시 주일과 같이 오전부터 저녁까지 교회에서 감당하다, 월요일 회사에서의 하루가 너무 힘들었다며 친구는 어제 말하였다. 나는 저의 고단함을 축복하였고 그에 따른 은혜를 구하였다.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시 119:19).

 

이는,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 1:19).”

 

세상을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이 땅에서의 유익을 우선하려는 마음이야 누구라도 같을 것이나, 성경은 우리에게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신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스스로 우리가 어찌 노력하는 그와 같은 노력이 우리의 올무가 되기 십상이어서, 여느 부모의 마음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자식들에게 순수하지 못한 것이니,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내가 애써 수고하는 것으로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마련이다. 본전 생각이 나는 것처럼 그 수고에 따른 보상을 스스로에게 갚아주려 한다. 그렇듯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살면서 돈을 마다할 수는 없는 일이나 그것이 또한 우리의 본성을 자극하는 법이어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3:9).”

 

저마다의 아집이 자신을 지배하는 가운데 결국은 고꾸라져야 한다.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0-62).” 그렇게 자신을 장담하던 사람이었으나 끝내 자신이 어떠한지를 알고 그 실체를 깨닫는 순간에야 주의 이름을 부르며 회개가 터져 나오는 법이다. 사람 참 완고하여서 저마다 자진하여서는 이를 수 없는 일이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그런 와중에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라헬의 행태는 참으로 불순하다. 자기 부친이 점칠 때 쓰는 드라빔을 훔쳤다.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창 31:19, 34).” 그 마음이 불안하였는가? 아니면 벧엘로 돌아가라 하시는 하나님이 미덥지 않았는가? 라헬의 선택이 가히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 같다. 교회와 세상에 둘 다 발을 담그고 혹시 몰라 자구책을 강구하는 것이 말이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9).”

 

곧 우리가 이와 같은 확신으로 붙들리지 않으면 라헬의 선택이 우리 모습이 된다. 늘 우리로 엄습하는 세상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이에 우리가 붙들 것은 말씀으로였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오늘의 무게가 어떠하든지,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4:8, 18:2).

 

그리하여 오늘도 주어진 한 날을 산다. 출근 시간이 당겨져서 아이가 오전 7시 반에 성경공부를 하길 원하며 성경 두 곳을 보내왔다. 새벽에 아이의 카톡을 보고 그 성경을 찾아 앞서 묵상하고 전하여야 할 말씀을 준비하는 것도 일이다. 내게 두신 한 날의 사명으로 이를 완수한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눅 16:16-17).”

 

율법은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의 모세 오경을 그리고 선지자의 글은 모세 오경을 제외한 구약의 나머지 부분을 가리킨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의 사명자이다. 이에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의 대명사다. 이를 예수님은 ‘요한의 때까지요’ 하심은 율법과 선지자의 활동시기와 예수님의 활동시기를 구분한다. 이후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의 시대로, 교회의 시기로 구분된다. 이에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온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가 저변에 깔렸다.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더불어 이 땅에 실제하였다.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곧 천국이 ‘침노를 당하다’라는 것은 역동적으로 우리가 이 복음을 듣고 받음으로 저마다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더 나은 부활을 살고자 한다. 이에 세례요한까지 선지자들은 도래할 천국을 예비하였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천국은 이미 도래한 것이다. 비록 종국적으로 이 땅에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예수 안에서 우리는 살면서 천국의 현실로 들어왔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진입, 곧 개개인의 믿는 자들로 침노당하고 있다.

 

하여 이 말씀은 세상이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구약의 말씀’, ‘율법’은 변하지 않는다. 구약의 예언과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곧 오늘도 우리가 다루며 묵상하는 구약의 율법의 말씀은 구원의 확실한 길라잡이가 된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또 한 곳은 죽은 거지 나사로와 어느 부자의 이야기에서 부자가 지옥에서 간구하는 내용이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눅 16:27-29).” 곧 죽은 나사로를 살려보내 아직 이 땅에 있는 형제들에게 죽음 너머의 일을 알게 해주십사 하는 것인데, 죽은 사람을 통해 산 사람에게 어떤 전갈을 보낼 수 있다는 미신적인 발상은 오늘도 여전하다.

 

실제 사울이 다급하여 엔돌에서 죽은 사무엘을 끌려올렸던 적이 있다(삼상 28:8-19). 그때도 영매를 통해 그리한 것인데, 사람의 죽음은 후에 즉시 서로 다른 두 영적 세계로 옮겨진다. 또한 이 세계와 저 세상은 교통하지 못한다. 이를 아브라함은 분명히하고 설령 그런다 한들, 곧 죽은 자가 살아나 알려주는 말을 저들이 현재 곁에 있는 선지자들 곧 복음을 듣고도 알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구약의 사울은 사탄의 기만에 속았다. 오늘날 안 믿는 자들도 그렇고 믿는다는 이들도 이런 데 현혹되곤 하는데 모두가 사탄의 농간이다.

 

죄가 끔찍한 것은 결국 지옥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엄정한 사실을 알게 된다. 부자 그런 가운데 죽은 나사로를 보내주도록 요청한 것은 그저 이기심 때문이다. 현실에 있는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들에게 듣고도 믿지 못하면 죽은 자가 살아오든지 시체들이 모두 일어나 아우성치든지 그 결과는 다를 게 없다. 설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 하늘의 실정과 하나님의 전한다 한들 오히려 저들은 나사로를 영매나 신격화하여 엉뚱한 데서 진리를 왜곡할 게 뻔하다. 예수도 당신이 죽음에서 일어났을 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사람이 참, 그런 것이다. 죄는 결국 사망에서 깨닫는다.

 

이와 같이 아이가 먼저 보낸 성경을 살피고, 혹은 친구가 어려워하는 성경과 현실의 괴를 설명해야 할 때, 이를 두고 말씀 앞으로 먼저 나를 세운다. 하여 나는 그때마다 주를 찾는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10:1).

 

때론 지치고,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2).

 

주께 아니면 아뢸 곳이 없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12).

 

내 심령이 가난하고 또 가난하여져서 주 없이는 단 한 순간도 견디기 어려울 때 오히려 감사가 나온다. 내가 어찌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불안하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14, 17-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