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전봉석 2024. 8. 22. 04:24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창 32:31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시 11:7

 

 

우리가 하나님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며 끈기 있게 붙들고 기도하는 일이다. 오늘 야곱은 홀로 남겨졌을 때이다. 겉으로는 일가를 이뤄 성공하여 돌아오는 듯 하나 저는 외로이 자신만 남기고 모두 앞세워 보냈다. 그때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창 32:24-25).”

 

여기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로 미가엘일 것이란 견해도 있다. 야곱은 그를 하나님이라 불렀다. 하여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30).”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과 천사를 교차하여 자주 언급하였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호 12:3-5).”

 

이 사람은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여호와의 천사’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창 22:11).” 그렇듯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즉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삿 6:12).”

 

이를 성육신 이전, 구약의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창 16:7-8).” 그런 상대를 만나 ‘씨름한다’는 것은 ‘먼지를 일으키다’란 뜻으로 격렬하게 몸싸움을 또한 기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씨름한다는 것은 또한 ‘단단히 붙잡다’, ‘껴안다’란 뜻으로 필사적으로 붙들고 놓지 않아 싸움하듯 영육간의 모든 힘을 다 쏟아 붓는 일이다.

 

그처럼,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호 12:4-5).”

 

필사적으로 간구하는 것은 예수님 같이,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이와 같이 야곱의 기도하는 절박함과 필사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우리로 상상하게 한다. 오죽하니 여호와의 천사가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이때 성경은 분명히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7-28).” 하며 야곱의 승리를 인정한다.

 

오로지 기도밖에는 없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시 91:15).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로 영화롭게 하신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이와 같은 말씀에서,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나는 이를 역설적이게도 고통 중에 자주 깨닫는다.

 

어제도 허리와 무릎에 주사를 맞을 때 맞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때까지 대기하고, 또 들어가서 준비하고 의사가 오기까지… 나에게는 그 시간이 공포와 같이 두렵다. 하도 식은땀을 흘려서 그런가 모든 게 다 끝나고 난 뒤 한기가 느끼지듯 실내 온도가 낮고 차가웠다. 그러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나?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도움을 바라며 주가 함께 하시기를….

 

역설적으로 오늘 본문에서도 환도뼈가 꺾이는 정도로 고통이 따랐다. 환도뼈는 둔부 아래쪽에 있는 좌골로 엉덩이의 골반을 형성한다. 상식적으로 알듯 사람의 몸을 받쳐주는 물리적 힘의 생성부분이다. 종종 ‘생명과 힘의 근원’을 상징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 35:11).”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히 7:10).”

 

결국 내가 의지하고 나를 지탱하던 육적인 수단으로, 나로 의지해 왔던 모든 자신과 아집과 그에 따른 완고함이다. 이를 꺾음으로 이후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다. 나는 자주 이를 경험한다. 나의 어떤 본성이 나로 충동하여 욱, 하고 일어날 때 이를 지탱하지 못하도록 어떤 어려움 혹은 고통이 나를 고꾸라뜨린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처럼 진술하였을까?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어찌 기뻐할 수 없는 순간인데 그리하여 그때에 주의 이름만 부르게 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창 32:1-2).” 더는 어찌할 수 없는 순간에 주께 모두 맡김으로 얻는 겸손은 자포자기가 아니다. 비로소 드는 확신이다. 주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나는 약하나 주의 군대가 앞장서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다른 그 무엇보다 주를 의지하는 것으로 평안을 얻는 어린아이와 같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그러할 때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이에,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119:165).

 

나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새삼 감사하다. 나의 연약한 육신과 마음의 어려움을 주가 아심으로 더는 두려워만 할 수도, 공포에 질려있을 수만은 없을 때 주의 이름을 되뇌며,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사 33:14).”

 

나를 돌아보아 주 앞에 내려놓는 시간이다. 기도는 염치불구하고 주 앞에 죄 된 나의 모습 그대로 아뢰는 일이다. 그저 다만 주를 부르며,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이를 현세에서 실천할 수 있는 길은 ‘환도뼈’까 꺾일 때이다. 더는 나의 의지나 위로가 전부가 아닌 것을 알고 주를 인정하는 때이다.

 

야곱은 20여년 일구어 온 가족과 그 재산을 모두 앞세우고 자신만이 홀로 남겨졌다. 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제단을 쌓고 그 앞에 엎드리는 일뿐이었다. 문득 나의 모친이 생각난다. 층층 시댁에 모든 가산을 잃고 뒤늦게 부르심을 받아 신학을 하는 부친을 따라, 나의 어머니는 하나님께 다 맡기었다. 자식 넷을 키우는 데 있어서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둬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다짐으로 열에 들떠 곧 죽을 것 같은 막내 동생을 예배당 바닥에 놓고 주의 이름을 불렀다. 나를 비롯하여 형제들의 이탈과 방황에도 어머니는 하나님께 맡기셨다. 주가 세워 사용하시든지 죽이시든지…. 가끔 나의 모친의 그와 같은 회상을 들을 때면,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하신 주님의 말씀이 어머니로 강하게 붙든 게 아닐까? 주께 맡김으로 오늘에 이르러 우리 사남매는 모두 목회를 하고 사역을 감당한다. 가끔은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내가 제일 늦었고, 부끄럽고, 송구한데 ‘나 같은 죄인’까지도 기어이 주 앞에 붙들어다 세우신 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 아닐까? 어머니의 환도뼈를 꺾으심으로 더는 그 무엇에도 의지하거나 도움을 바라는 일 없이 오직 주만 바라게 하심으로 말이다. 실제 나의 어머니는 골반뼈 한쪽을 인공관절로 하여 약한 걸음으로 하루를 산다. 모든 게 주의 은혜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5).

 

하시는 시편을 다시 한 번 되뇌며,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이거나,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45-46).”

 

우리의 슬픔 뒤에 여호와의 군대 마하나임이 서신다. 우리의 절박하고 간절한 간구 앞에 어떤 사람,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끄신다. 나를 상대하시며 주 앞에 바로 세우신다. 하여,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하여 다시 오늘에 감사하며,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11:1).

 

더는 누가 뭐라 하든, 어떤 일이 가로놓이든,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3).

 

오직 이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4).

 

이에,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