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창 33:20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시 12:6-7
비로소 돌아와 야곱이 세겜에 단을 쌓았다. 아브라함이 처음 가나안으로 들어와 제단을 쌓은 그곳이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창 12:6-7).” 하나님의 섭리로 그들을 인도하심이 기이하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은 ‘강한 자로 서시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엘’과 ‘~의 하나님’이란 뜻의 ‘엘로아흐’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직역하면 ‘강한 자로 서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표현이다. 야곱은 자신과 벧엘에서 계약을 맺어주시고 ‘이스라엘’이란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신 그의 하나님을 기념하고 있다.
하나님은 얍복강 사건으로 야곱의 인격을 변화시키셨다. 그때 야곱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32:24-32).”
그때 야곱의 인격을 변화시키셨고, 에서의 불같은 증오심을 형제의 깊은 우애심으로 승화시키셨다. 하나님은 일하신다. 저마다의 본성과 기질을 변화시켜, 20년 간 불화가 심화되어 적이 되었을 수 있는 처지를 화해하게 하셨다. 곧 우리 심령의 변화는 그 주체가 하나님이시다.
믿음으로 살면서 이와 같은 자신을 자주 목격한다. 가령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친구도 오랜 세월 지켜봤던 저와 오늘의 저는 다르다. 물질관계에서 인간관계까지 내가 알던 예전의 친구가 아니다. 또한 이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의 은혜를 고백할 때면 낯설기도 하다. 나 역시 일련의 교통사고에서 처음 사고 현장에서 내 차량의 제조사인 공업사로 입고할 것을 말했다는데 어찌 서로 말이 와전되어 출동했던 이가 자신들 협력업체로 가져다 고친 것이다. 이를 가려 나는 문제를 제기하다 그렇게 될 경우 사고 현장으로 출동했던 이가 그 모든 과실을 지고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고 하는 말에 더는 내 입장을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
사소한 일이나 이런저런 현실에서의 변화는 나타난다. 에서가 달라졌고 야곱이 변하였다. 하나님은 화석처럼 굳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신다. 우리는 어느 순간 ‘온유한 자’로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주신 한 날의 삶, 곧 오늘의 땅에서 예수로 충만한 삶을 산다. 하나님 없이는 이러한 삶을 추구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이야기의 소재가 되듯 인간은 내면의 후회나 서러움이나 노여움을 안고 더욱 더 완고하여진다. 그러나 오늘 에서와 야곱의 만남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저들이 화해하는 장면은 놀랍지만 또한 자연스럽다.
그렇게 두 형제의 만남과 뜨거운 화해 장면을 묘사한 후 야곱이 세겜에 머무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삶이 더러는 꼬이고 망가져서 뜻하지 않은 길로 가는 것 같으나 언제나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은혜에 합당한 자로 살게 하신다.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오면서 곧장 벧엘로 올라가 20년 전에 서원하였던 일을 이행하였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28:20-22).”
그런데 어쩌다 숙곳에 여장을 풀고 집을 마련하고 세겜 땅에 거주한다. 그러던 중 야곱의 딸 디나가 추행을 당하는 사건(34장)이 전개될 텐데, 그때에서야 다시 야곱은 벧엘로 올라간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35:3).” 결국 우리가 잠시 안주하려 할 때 하나님은 개입하신다. 어떤 좌절과 고통 뒤에는 항상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 야곱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이 있다.
뒤늦게 나로 돌이켜 신학을 다시 하게 하시고 오늘에 이르러 목사로 살게 하신 데 따른 그와 같은 경로가 나는 늘 신기하다. 더러는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나게 하심으로 깨지고 고장 나서 어려움을 겪게 하심으로 주께 돌이키신다. 앞으로 전개될 야곱의 인생에서도 하나님은 그와 같은 역사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켜 가시고, 이스라엘의 여수룬으로 성장시키시기까지 멈추지 않으신다.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사 44:2).”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은 우리의 매 고비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와 찬송이 넘치게 하신다. 우린 이처럼 성경을 접할 때마다 야곱의 개인사나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그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이제 아는 나의 날들을 돌아보며 어느 순간에도, 비록 그때 하나님을 멀리하며 더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때와 같았을 때도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도우시고 살피시고 함께 하셨는지를 알게 된다. 이를 나와 함께 수십 년 같이 친구로 지냈던 가까운 이들과 서로 고백하며 주를 인정할 수 있을 때는 더더구나 감격스럽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이 놀라운 삶의 지혜에서, 우린 하나님의 진실하신 약속을 듣는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리하여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나는 이제 나를 위해서 뿐 아니라 내 곁의 변화된 친구들과 곁에 붙이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두고 간구한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14-15).
우리 삶의 브니엘에서 우린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 32:28, 30).” 곧 우리 믿는 자들은 저마다의 브니엘에서 우리 안에서 새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를 만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오늘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그곳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확신한다. 곧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이와 같은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때 우린 새로운 우리 자신을 만나게 된다.
곧 우리의 변화된 이름들… 의인, 성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등.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에 우리 생에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바,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인 자임을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게 하신다. 이제 더는 예전의 우리 자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원치 않는 사고였으나 그로 인하여 나는 거의 매일 물리치료를 받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주사치료를 받는다. 앞서 아내와 장모가 다니는 병원이었는데, 의사는 내가 갈 때마다 ‘목사님’ 하며 반가이 맞아주고 여러 간호사와 직원들도 극진하여 송구스럽기도 하다. 엊그제는 사고현장에 출동했던 보험사 직원이 전화하여 서로 엇갈리는 주장을 하다 나에 대한 호칭을 목사님으로 하면서부터 더는 내 주장만 옳다고 우겨댈 수가 없었다. 오늘의 여러 일들이 새로운 나로 바꾸어놓는 것을 느낀다. 그런 가운데 누가 알든지 모르든지 주를 모시고, 주의 일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
설령 그것이 어떤 의도나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이라 해도 그런 가운데서 주를 바라고 의식함으로 우린 더욱 주를 가까이 하길 원한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이와 같이 주가 행하시는 일이 때론 놀랍기도 하다. 우리 안의 다툼을 물러가게 하신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그리하여,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76:10).
이를 실제 삶에서 체험하고 사는 일이란 스스로에게 놀라운 일이다. 내가 어찌 하려 했던 일이 주가 이루신 것을 알 때 감사와 찬송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그러니까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기고 내 주장이나 나의 고집대로 살던 것이 하나둘 내려놓게 되면서 새로운 나를 목격하는 것이다.
오늘 에서와 야곱의 만남에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서로를 변화시키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 흔히 시간이 약이고,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은 헛소리다. 나는 노인들의 완고함과 그 고집 앞에 때론 기겁을 한다. 막무가내로 구는 이들이나 그때마다 얍삽하게 자신의 신념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늙은이들을 나는 혐오한다. 그런 까닭은 나 역시 그럴 소지가 누구보다 농후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늘 보면 유난히 더 화가 나는 부분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본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우린 저마다 스스로가 의로울 수 없다. 그러나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린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할 때 주의 도우심을 구한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44:5).
내 안의 적이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늘 나를 괴롭히고 넘어뜨리는 적은 내 안에 있다. 나의 본성과 아집이 욱, 하고 올라올 때는 스스로도 느끼는 게 ‘아직 참 멀었다’ 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12:1-2).
실은 내 자신이 그러한 자임을 인정할 때, 그런 가운데서도 나를 세우시고 나 같은 자를 목사로 위하고 존중하는 이들로 인하여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이 들어 나를 돌아보게 하심이 귀하다. 오늘도 나의 브니엘에서 주께 서원하며, 나의 벧엘에 올라 제단을 쌓으며 새로 부여받은 이름으로 주께 아뢴다.
그러할 때,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
(6-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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