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창 34:1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 13:5-6
야곱의 최종 목적지는 세겜이 아니었다. 물론 세겜도 가나안의 일부이나 저는 벧엘로 갈 것을 서원하였었다. 그럼에도 야곱은 이를 망각하고 미적거리고 있던 것인지, 세겜에 안주하려 했던 것인지, 그러다 이 사달이 났다. 야곱의 딸 디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세겜으로 들어갔다.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창 34:1).” 그럴 수 있는 일이 실은 그때 오빠들이 모두 집을 비운 사이의 일이기도 하다. 방심하였고 안이하였고 무모하였다.
우리 신앙에서 완성이란 있을까? 야곱은 돌아와 얍복강가에서의 씨름으로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고백할 정도였다.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창 33:20).” 우리의 신앙은 그 고백으로 드러나지만 그 어떤 고백으로도 완성과 안주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늘 우리의 고백은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 정진해야 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이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바울은 자기 스스로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2).” 그러므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어제는 친구를 나무라듯 뭐라 좀 했다. 주말을 이용해 형님과 함께 부모님 성묘를 간다고 하여 아직도 그 앞에 술을 올리고 절을 하는가? 하고 물었다. 늘 그래왔던 일이고 의당 그래야 하는 일이라 여겨 저는 당연하다는 듯 그게 왜 문제인가? 하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돌이켜 안 믿는 형님과 그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하라고 일렀다. 저에게 형님은 부모 이상이다. 내가 아는 저의 형님은 그럴만한 인격과 성품을 지녔다. 어릴 적엔 나도 저를 잘 따르고 좋아했다. 저의 논리와 가치는 세상의 중용을 가치로 둔다.
그런 형님과 행여 불편해질까, 분란이 생길까 하여 신앙적으로 마음에 꺼려지는 일임에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5-36).” 이 대체 무슨 말씀이실까? 이는 곧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7-38).” 이는 곧 주가 오신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으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
그러므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 스스로 어찌 잘 지내보려 타협하고 개의치 않는 것으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6).” 나는 이 부분의 내용을 근거로 형을 존경하고 위하는 것 같으나 형님으로 하여금 돌이켜 볼 기회를 너의 안이함으나 묵인으로 빼앗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서로 그 일로 마찰이 생기고 실제 싸움이 될 수도 있으나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때, 그러한 것을 그러하다 말하지 않을 때 돌들이 대신 외칠 것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
우리가 우리 스스로 주 앞에서 외치지 않고 찬송하지 않고 침묵하면 돌들이 우리 대신 소리칠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친구는 어떤 마음으로 들었을까? 매번 기일이 되면 여전히 제사에 참여하고, 몇 번은 추도예배를 드릴까 하며 예배 순서와 말씀 내용도 적어주었는데 실제 이를 그리 하자고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애매한 상황이나 어려운 점을 이해한다. 더욱이 저에게 형님이란 존재가 어떤 위상을 가지는지도 잘 안다.
우리의 신앙은 그와 같이 완성된 단계도 있을 수 없지만 머뭇거리며 뭉개고 있을 때 분명 어떤 사달이 난다. 오히려 그러한 불화와 갈등과 반목이 복이다. 그것으로 자신은 물론 상대에게도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할 기회가 있다. 그래서도 우리의 가장 무서운 죄악은 침묵이다. 묵인하고 외면하는 것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30:9-10).”
우리가 주께 향한다는 것은 스스로 나서서 그 일에 분풀이 하고 정의의 이름을 운운하며 칼을 휘두르는 게 아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 40:8).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고 살 때,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7-8).” 그러므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친구의 대답이 석연찮았고 나의 충고도 마뜩찮은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전하여야 했고, 저가 오늘 형님과 둘이 성묘를 가서 무엇을 어찌할 것인지… 나는 전할 뿐 이를 듣고 그 마음을 움직이시는 이가 행하실 것이다. 내가 재촉하고 강제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묵묵히 듣고 그 마음이 불편할지언정 뭐라 반박하지 않고 가만있는 것으로도 감사하였다. 여하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늘 그래왔고 다들 그러고 사는 일에 대하여 괜히 분란을 일으킬까 하여 침묵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신에게도 물론 상대에게도 그러하다. 우린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특히 안 듣는 일가와 그 가족들과의 불화를 각오해야 한다. 그렇게는 사회생활이 어렵고, 가족 간의 화목도 잃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곧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더러는 그렇게 묵인하고 타협하고 적당히 수용하다, 오늘 우리 안의 ‘디나’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욕을 당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일이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서로 암암리에 연을 맺고 살기도 한다. 굳이 믿는 자를 고집하다가 결혼이 더뎌지거나 못할까하여 안 믿는 가정이나 그 상대를 받아들이기도 하는데… 물론 주의 뜻 안에서 주가 우리의 허물까지도 선으로 바꾸실 테지만, 그러는 동안 이 난리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도륙과 살상과 노략으로 끝이 났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의 지체를 죽인다는 일, 이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우린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많은 교회가 또는 신자들이 자신들의 정욕을 쫓아 묵인하고 수용함으로 애매해지는 것들이 늘어간다. 당장의 유익과 즐거움을 마다할 수가 없다. 이에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곧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1-14).”
친구가 불편해하는 마음을 나도 안다. 주가 그 마음에 확신과 용기를 주시기를 빌었다. 그리 전하며 한 주간의 통화가 끝났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말씀 앞에 나 자신을 세우고, 나의 ‘디나’가 행여 무심히도 ‘세겜’을 기웃거리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본다. 때론 그것이 화가 되고 노여움이 된다는 사실을, 별 것 아닌 일에서도 불쑥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하여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우리가 주를 바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 14:6-7).”
분명한 입장을 지켜야 한다.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애매한 답이 자신은 물론 상대의 영혼을 병들게 할 수 있다. 서로의 불편함으로 오히려 주를 마주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친절한 타인은 구르는 돌과 같다. 있는 둥 마는 둥 롯과 같이 소돔에서 저의 존재감은 무력하였다. 설마 그러한 일상과 일가와 일순간의 일들로 안일하게 살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우리의 ‘디나’를 단속해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분명히 하여,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서로 좋은 사이가 그 영혼을 무뎌지게 할 수 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13:1).
정작 우리의 두려움은 사람의 외면과 반목이 아니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2).
주가 아니시면 안 되는 것에 대하여,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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