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창 37:5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지나 요셉과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족장을 중심으로 개인의 구속에서 하나님의 선민으로 구족사가 기술된다. 이에 그 이야기의 발단은, 요셉은 열일곱 소년이 되었다. 주가 주시는 꿈을 꾸었다. 이로써 형들의 미움과 시기를 샀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꿈이다. 그로 인하여 형들의 시기를 받고 애굽으로 팔려간다. 야곱의 슬픔이 그려진다. 이어지는 요셉의 수난은 하나님의 섭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예언을 이뤄 가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이스라엘은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민족의 역사이다. 장차 그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귀환하는 일은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인하여 미움을 받는 데서 출발한다. 그렇게 애굽으로 팔려 간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는데, 그 과정이 또한 기구하다. 그런 만큼 하나님의 은택은 놀라우시다. 미리 예정하신 뜻에 따라 이와 같은 역사가 전개되었다.
요셉은 야곱의 편애로 형제들 사이에서 외톨이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의 내적 동기가 작용하는 것을 본다. 앞서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생활은 야곱 일가의 애굽으로 이주가 선행되어야 했다. 이에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팔려 가게 하신다. 이런 일에 형들의 시기와 미움이 있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 14:30).”
시기란 그런 것이어서,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 비밀한 역사를 이뤄 가신다. 곧 우리로 영화로운 자리로 인도하시기 위해 시련과 채찍으로 먼저 연단하시곤 한다. 바울은 이를 두고,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고 알린다.
베드로도 역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그러므로 요셉에 대한 형들의 미움과 시기는 마땅히 옳지 못하나 이것까지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시는 데 발단을 삼으신다.
특히 요셉과 같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꿈으로 인해 형들의 미움과 시기를 받은 것이니,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할 때 그 마음에 미움과 시기가 들어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뒤집어서 생각하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으면 질투와 시기와 오해와 미움이 대신 그 마음을 채우고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 기쁘신 뜻에 따라 남다른 은총과 은사를 베푸시는 데 있어 고통과 역경도 함께 더하시기도 하신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곧,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그러므로 누군 이렇고 누군 저렇다. 서로의 다른 것이 자신의 특별함을 알게 한다. 어릴 적에 내가 아직 주의 뜻을 알지 못할 때는 남들처럼 되고 싶었고, 남과 다른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였고 주를 멀리하는 핑계로 삼기도 했다. 일찍이 나의 부친은 나의 특별함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였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 싫었다. 돌이켜 지금에서 생각하면 주의 은혜가 귀하였다. 나의 남다른 유년시절과 그에 따른 여러 만남 가운데서 특별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도드라진다. 후에 돌이켜 신학을 하고 주의 길을 걸어갈 때에 그와 같은 손길은 더욱 뚜렷하고 분명하였다. 어느 것 하나 주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데 이는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곳을 다닐 때’ 더욱 선명해진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1-4).
이를 우린 삶의 현장에서 늘 마주한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던져서 나를 구원하신 신실한 목자시다. 그렇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1-12).”
이에 따른 주의 도우심과 인자하심을 우린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날마다 체험하고 매순간 감사할 수 있다.
오늘 요셉의 길은 곧 예수님을 예표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곧 우리의 죄악으로 우리의 전적 타락은 하나님과 단절을 가져왔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누구도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이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를 두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4-5).” 그것으로 우린,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 8:6).”
곧,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9:15).”
이에,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12:24).”
그러므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이와 같은 말씀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은 우릴 우리 죄로 인하여 정죄하지 않으신다. 감히 말하지만 그리 못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십자가로 대신 죽어 보혈의 피를 흘리셨고, 죄의 삯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니 죄를 가벼이 여겨 다시 죄의 길에 설 수 있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 우린 비통해한다. 스스로의 연약함에 애통해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이때에 우리의 죄가 아무리가 크고 넓고 깊고 높다 해도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주의 사랑이 나의 죄보다 높고 깊고 길고 넓으시다. 즉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없나니, 이는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이의 은혜 때문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오늘 요셉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전형이다. 요셉이 구덩이에 빠지고(창 37:24), 팔리고(28), 감옥에 갇히고(20) 하는 동안 죽기까지 복종하는 모습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연상하게 된다. 요셉의 순종은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을 보게 한다.
처음 사람의 후예는 미움과 질투로 살인을 하였다(창 4:1-8). 오늘에 이르러는 이 기준이 강화되어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 하신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따라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4:20).”
그런 만큼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 그 이상의 엄청난 사명이고 사역이다. 요셉의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게 된다. 우리의 근본적인 죄는 회개로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나의 죄 됨을 인정하는 데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주의 크신 사랑으로 산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이를 알게 하시려고 내 곁을 지키게 하셨던 여러 인물과 그들의 영향으로 오늘의 내가 있음을 인정한다. 내 기억이 닿는 순간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때마다 주는 이런저런 사람을 보내셨고, 여러 상황 속에서 그때마다 돕는 손길을 두심으로 저들로 나의 하나님을 목격하고 인정하게 하셨다. 이에 오늘도 주가 더하시는 꿈을 꾼다. 예언의 말씀을 묵상한다. 더하시는 한 날의 수고로 족한 줄을 알게 하신다.
엊그제는 어느 60대 노부인이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가? 하고 문의를 했다. 살아오면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글로 쓰고 싶은데 너무 막연하여서 어찌할까 하다 여기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대화 가운데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인지, 새삼 궁금하게 여겨졌다. 무더위를 조금 피해 9월 어느 날 연락을 하고 찾아오겠노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우연 같은 아니 실제적인 어떤 일들이 나의 삶의 여러 곳곳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럴 때마다 어릴 적 나의 병간호를 하였던 어느 권사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병실로 찾아오다 후에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였던 소경 장로님도 생각난다. 설득하고 당부하며 억지로라도 등 떠밀듯 신학을 해야 한다며 학비까지 내어주던 어느 손길도, 얼굴도 모르는 누구의 기도와 후원도… 나는 늘 이와 같이 믿기지 않는 현실을 살아왔고 살고 있다.
이에,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16:1-2).
나의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오는 말들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5-6).
이에,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7, 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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