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 39:23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1-2
37장에서 39장으로 이어지는 요셉의 이야기다. 중간에 38장에서 유다의 이야기가 들어가면서 저가 며느리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 다말의 이름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 유다, 이스라엘의 가나안화를 막으시려고 요셉을 앞세워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으로 고스란히 옮겨 보호하심의 목적을 알게 한다.
가나안에서 유다의 행적과 오늘 이어지는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함께하심이 돋보인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 3).” 또한 억울하게 옥에 갇혔을 때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21, 23).”
애굽으로 팔려 간 것이나 요셉이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도우시고 계시는지, 우리로 이를 주목하게 하심으로 오늘 나의 삶 가운데 어떻게 나의 하나님은 함께하고 계시는지를 알게 한다. 때로는 유혹과 모함으로 우리 신앙의 순전함을 알아보시고, 억울하게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로 살게 하심을 목격한다.
오늘 우리의 어떤 처지가 어떠하여 어찌 되었다 해도, 우리의 임마누엘 하나님을 증거 한다. 이는 곧 우리로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 시련을 통한 형통함과 축복을 깨닫게 하신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주어진 삶에 충실할 때 역경을 극복함으로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은혜의 손길이 우리 삶에서 어디까지 개입하시고 함께 하시는지 알려준다. 인생은 순탄할 수 없고 갑작스런 상황과 여건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 됨을 알게 하신다. 그렇게 어제 오전에도 일찍 아이의 출근 전에 같이 말씀을 나누면서 이를 찬송하고 감사하지 않으면 우리 대신 길가의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란 사실에 우린 같이 놀라워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
이는 하박국 선지자의 표현과 같아서,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합 2:11).” 곧 우리가 죄를 죄라 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께 찬송하고 사람들에게 선포하지 않으면 담에서 돌이, 집에서 들보가 아우성칠 것이다. 즉 우린 살면서 우리 스스로를 숨길 수 없는 것에 사명감을 가진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또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4-15).”
그러므로 우린 드러나는 사람들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오늘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을 때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심으로 그 집이 형통하였던 것 같이, 억울하게 옥에 갇혀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숨길 수 없어서 간수장이 그에게 옥을 맡기었던 것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은 맛이 나고 빛이 드러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밝힌다. 그런 가운데 우린 늘 도전받고 어떤 위기에 처하기도 하나, 오늘 요셉과 같이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하는 신앙은 고백되어야 한다. 일견 그것이 기회인 것 같고 시쳇말로 운이 따르는 듯하나, 이것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무엇일지 우리는 가늠하게 된다. 당시 요셉의 나이 스물 하고 서른 남짓, 젊은 혈기에 보디발의 아내는 기회였다. 억울하게 팔려와 미래가 없는 듯 노예생활을 하느니 주어진 기회를 통해 스스로 야심을 채울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요셉은 그 유혹에서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39:12).” 겉으로는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나 하나님의 주목 받는 생으로, 어딜 가나 주가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었다.
이에 오늘 우리도 ‘모든 시험을 단번에 부술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이는 곧 우리가 스스로의 죄를 두고 주 앞에 분개하는 이유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이를 절규하며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때론 이와 같은 답답함으로 이처럼 말씀 앞에 나를 앉히며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15).” 나의 이 본질적인 죄악을 주 앞에서 인정함으로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 그리하여 무던히 자신의 죄 됨을 두고 씨름하고 싸우는 일이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또는 나 자신에게조차 만족함을 주지 못한다 해도 주신 상황 속에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때로는 연약한 육신을 건사하고 돌보는 일도 주께 향한 사명이려니, 더는 나이질 수 없는 스스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하여 주를 찬송한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1-2).
이렇게 주를 인정하는 것이 나를 에워싼 모든 사방으로 퍼질 때,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나의 그 어떤 약함도 혹은 실패와 좌절도 우릴 굴복시킬 수는 없는 것이어서,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그리하여 나의 삶이 간증이 되고 찬송이 되어 누구에게 드러날 때,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오늘 ‘이 요셉’을 누구도 감당할 수 없고 어떤 상황도 억누를 수 없는 것과 같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것이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였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하신 그, 자기 십자가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었다. 이를 내가 살면서 내 육체에 채움으로 그의 몸된 교회가 된다. 그렇듯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2).”
비록 오늘 요셉은, 우리는 노예와 같고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인 듯하나,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신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8-20).”
그리하여,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오늘도 이와 같이 주신 모든 상황에서 주를 바란다. 그와 같은 능력이 우리 안에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하게 하시는 이가 하실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은 주를 인정하는 것뿐이다. 사는 게 노예 같은, 혹은 감옥에 갇힌 듯한 날들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을 가장 선명하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일이었으니,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18:3-5).
그렇다 해도,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6).
이를 욥은 깨달아서,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는 굳건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니,
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19).
오늘을 사는 시편은 놀라운 세계를 열어준다.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21, 24).
오늘도 이와 같이,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8).
그리하여,
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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