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창 36:6-7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1
이삭의 죽음으로 에서로 인한 야곱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일단락된다. 오늘 말씀은 그에 따라 이삭의 죽음에 이어 야곱의 이야기로 전개될 것 같은데 먼저 이스라엘의 주변국을 이루게 되는 에서의 이야기로 에돔 족속의 형성을 전개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할 자가 과연 누구인가를 더듬게 한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 26:4).”
이에 따른 축복의 주인공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소개하기에 앞서 에서와 야곱을 역사 가운데 분리하고 계심을 보게 된다.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36:6-7).”
오늘 본문은 세일 산을 중심으로 한 민족을 이루는 에서의 계보(1-19)와 에서 곧 에돔족속이 세일 산을 차지하기 전에 거주하던 호리족의 계보(20-30)와 국가를 이루는 에돔 족속을 통치한 왕들의 계보(31-43)가 나열되고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여전히 가나안에서 나그네로 정착하지 못한 야곱의 족속 이스라엘과 대조를 이룬다.
약속의 땅에 대한 축복을 가진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하고 정작하는 데 있어 국가를 형성하고 땅의 것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보게 한다. 이처럼 에돔 족속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성경의 한 장을 차지하는 이유는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단련하시는 데 따른 주변국의 형성과정을 보여주시는 것 같다.
분명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 하신 말씀을 이루어가시는 데 있어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6-7).” 하신 말씀에 대한 전개 과정이다.
다시 돌아가 에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났다. 이방 땅 세일 산을 중심으로 터전을 이뤘다. 곧 육신의 정욕을 좇아 허탄한 땅의 정작을 택한 것이다. 그에 따른 원인 가운데 하나를 오늘 본문은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창(36:2).” 곧 가나안 여인으로 아내를 삼은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제외되어 이방화 된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삼은 것이다.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3).” 그렇게 사사로운 듯하나 같이 하는 이와의 이와 같은 결혼이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되는 듯 오늘 본문의 서두를 전개하고 있다.
성경은 일러,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그로 인하여 파생되는 영향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수 23:12-13).”
오늘 날 이와 같은 말씀이 얼마나 희소성이 떨어져 가벼이 여겨지는지 잘 안다. 서로 좋으면 그러다 주가 인도하심으로 안 믿는 이가 믿는 이의 영향으로 주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쪽으로 받아내는데, 엄연히 질병과 건강 중에 질병이 전염성이 높다.
또한 에서가 야곱에게서 떨어져 곧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게 된 계기가 많은 가산으로 인한 것이다.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36:7-8).” 그러니 시쳇말로 여자와 돈이 문제다. 그래서 지혜자는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 22:1).” 하고 충고하는데, 보면 안 믿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할 때 그 가는 길이 더디거나 멀다. 물론 뒤늦게 돌이켜 주의 은혜로 하나 되게 하심을 목격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안 믿는 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많은 재물에 그 관심이 기울기 일쑤다.
이에 그 후손을 이뤄가는 데 있어 신앙으로 믿음 안에서의 양육이 또한 얼마나 중요한가를 되새기게 한다. 야곱의 자녀들은 비록 이방 땅인 하란에서 태어났으나 주를 경외하는 자들로 자랐고, 에서의 후예는 상대적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태어났으나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이방 문화를 따라 자랐다. 성경은 누누이 이르시길,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7-9).”
하여,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곧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에서의 후예들은 누구 하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들의 조상 이삭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재산이 풍부해졌고 식솔이 늘어 서로 목초지가 부족하자, 에서는 사냥에서 돌아와 배고파하다 장자의 축복권을 팥죽 한 그릇에 넘겼듯이 저들 조상들의 축복의 땅 가나안을 아무렇지 않게 떠나 세일 산 이방의 땅으로 옮겨가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이후 에서의 후손은 잔혹하고 호전적이어서 약탈과 전쟁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들의 거주지는 척박하고 황량한 땅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모친 리브가의 태중에 두 아이가 있을 때, 두 민족이 있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되어져감을 의미한다. 에서, 곧 이방의 역사이나 이처럼 성경의 한 장을 그대로 열거하며 저들의 형성을 기록하신 이유는 그런 것이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에 대하여, 저들의 공격적이고 잔인한 통치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단련시켜 세상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져 가는 것을 알게 하신다.
에서가 에돔으로 불리게 된 계기도 혈통의 차이로 한 족속에서 다른 족속이 또는 부족이 서로 혼용되었기 때문이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창 26:34-35).” 나는 내 아이들의 짝을 두고 부디 믿는 가정의 믿는 아이로 특정하여 주께 구한다. 다시 말하지만 안 믿는 자와 결혼하여 같이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러는 과정이 너무 길고 더디다. 행여 잘 믿던 길에서도 이탈할 수 있다. 사사로운 일 같으나 결코 사사로울 수 없음으로 오늘 본문의 서두 부분을 그렇게 전개하여 에서를 형성하는 길의 주축이 어디에 이뤄지는가를 알리고 있다.
빠른 시간에 에돔 왕국을 이루며 상대적으로 야곱의 후손들보다 일찍 정착하여 크게 번성하는 것 같으나 저들의 역할은 이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괴롭히다 대부분 멸망하는 족속으로 역사 속에 등장하였다가 사라지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이와 같은 말씀으로 결혼 상대를 신중히 선택하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너무 지나치다고 할지 모른다. 이를 위해서도 오늘 에서와 그 아내들과 후손들을 다루며 성경의 적잖은 부분을 할애하신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일 땅에서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이 그것의 원주민인 호리 족속을 흡수하고 서로 융화하는 과정이 세상적으로는 성공적으로 보인다. 호리 족속 중 7명의 족장(창 36:20, 21, 29, 30)과 21명의 족장의 후예들(22-28)이 크게 서로 마찰 없이 융화되는 것은(대상 1:38-42), 에돔과 호리 족속 간의 통혼으로 인 것이다(창 36:22, 25). 에서의 후예와 호리의 후손이 서로 동화되어 하나 되면서 에서의 후손은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방 민족이 되는 과정이다. 오늘 본문에서 에서의 아내가 된 호리족의 오홀리바의 아버지 아나는 나귀를 치다가 광야에서 자연 온천을 발견하였다(24).
물질적 풍요와 그에 따른 이방화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늘의 신령한 것에 더는 무관심하게 한다. 그래도 잃어버린 축복을 놓고 목놓아 울던 에서의 침울했던 시간이 순수하게까지 여겨진다. 하나님 없는 번영은 악이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것으로 세상의 것에 가치를 둘 때 물질이 우상이 된다. 그와 같은 번영이 자신의 교만이 된다.
안 믿는 가정으로 시집가서 나름은 주일을 지킨다고 하지만 처음 약속과는 달리 신랑도 자연히 주일을 멀리하고, 재력이 있는 시댁은 이런저런 물질적인 풍족함으로 나름 오늘 내일 부족한 것 없이 잘도 사는 것 같으나… 나는 딸애 친구가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라 그리 선택하여 오늘 잘 사는 소식이 더러 겁이 나기도 한다. 엊그제는 출산을 앞두고 같이 모여 축하도 해주고 왔다는 말에 속으로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주일은 지킨다니? 그래도 교회는 나가고? 하는 물음을 던지다가 그만두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에이, 설마! 하고 나중 일을 알 수 없으니 아직 목회일선에 있는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까? 하고 생각하다 그 역시 그만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이와 같은 말씀이 사사로운 듯 막연하게 잘 되겠지, 하다 너무 먼 길을 돌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2-14).”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자로 이 땅에 살고 있는지! 에서가 그 얻은 아내들로 인하여 혹은 가진 게 많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떠난 세일 산으로의 정착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등진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줄 알았던 일말의 신앙도 이방의 땅에 묻어버린 것이다. 겉으로는 에서의 후손들이 세일 땅과 원주민 호리족을 점령한 후 그곳에 강력한 에돔 왕국을 건설한 것 같이 보여, 상대적으로 야곱과 그 자손들의 나그네 생활이 대비되는데, 이 땅의 모든 역사는 일시적이다. 에돔 왕국의 왕이 된 자 8명의 명단(대상 1:43-54)과 아브라함의 자손 야곱의 후예들은 초라하게 대비되나 외형적인 번영과 풍요가 전부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미미한 것 같고 불의한 세상에서는 더더구나 실망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 11:15).” 우리의 역사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오늘의 현상으로 부러워하거나 속상해할 게 아니다. 가령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 당시 이스라엘은 에돔과의 무력 충돌에서(수 15:1, 21), 또한 사울 때 이르러 잦은 충돌(삼상 14:47)과 마침내 다윗에 의해 에돔이 정복되고 그 땅에 이스라엘 수비대가 서게 되는 것을 보면서(삼하 8:14)…….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1).
오늘 시편은 이 원론적인 질문으로 우리로 바른 자세를 가지게 한다. 곧,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2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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