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창 38:18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17:15
이어 요셉이 애굽에서 겪는 이야기에 앞서 유다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서 자식을 본다. 그에 앞서 두 아들의 죽음이 건조하게 소개된다. 결국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났다.
요셉의 이야기가 잠시 접히고 유다의 이야기가 드러나는 데는 후대의 편집을 운운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 구성을 의도적으로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성경 전체의 흐름을 파악할 때, 이어져야 하는 요셉의 이야기 전개에서 유다의 이야기가 삽입된 것은 먼저 유다가 그 자식들을 이방 여인과 통혼시킨 문제다. 만일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모두 그러하였다면 저들을 선민으로 세우신 데 따른 순수성을 보존하기 어렵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 땅으로 따로 구분하여 들이셨다. 그런 가운데 놀라운 사실 하나는 유다가 다말 사이에서 낳은 베레스를 통하여 메시아의 혈통을 잇게 하셨다는 것이다. 늘 보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부패한 우리의 타락과 더불어 메시아가 오셨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는 천한 자와 패역한 자와 무식한 자와 가난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죄인을 포용하신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하신 주의 음성이 새삼 귀하고 감사하다. 늘 내게 더하시는 은혜가 나의 허물과 그 연약함을 인정하며 주께 나아가게 한다.
어제도 거짓말 같은 일이 전개되었다. 우리 관리비와 별도로 같이 에어컨을 사용하는 옆 사무실에서 이번 달 전기료가 30만 원 가까이 나와 우리가 10만 원 이상을 더 부담하게 된 것이다. 워낙에 덥기도 하여 거의 종일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평소 우리 쪽 관리비의 반 이상을 더 보태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교회 통장을 확인하고 이틀 뒤 보내야 할 임대료를 계산하고 몇 만 원 남은 것을 탈탈 털어서 저에게 입금을 하고 난 뒤였다.
시무룩하니 늦은 도시락을 마저 먹는데 교회가 속한 교단에서 전화가 들어왔다. 교단 차원에서 50교회를 선정해서 후원헌금을 보내는데 우리 교회가 그 가운데 뽑혔다는 것이다. 마침 그 시간에, 나의 마음은 어떠하였는지 모르겠다. 근근이 이어가는 교회에서 그러는 중에도 감사하는 마음이었는지, 늘 간당간당한 형편으로 시무룩해하고 있었는지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나를 놀라게 하신다. 내가 어찌 염려하여 이뤄 가는 게 아닌 것을 그때마다 알리시는 것 같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으로 애굽에 팔려갔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저들을 애굽이란 그릇에 담아 구별하심으로, 단련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함이란 것을 오늘 유다를 통해 알 게 된다. 저들이 그대로 가나안에 흩어져 살았더라면 그 주변 이방 족속과 통혼을 하고, 자신들의 신분을 망각하여 저들을 선민으로 세우신 민족성을 잃었을 게 뻔하다. 물론 유다가 그 며느리, 이방 여인 다말과의 근친상간으로 얻은 자식이나 그에게서 예수님의 계보를 잇게 하신 것도 놀랍고 귀한 은혜다.
아브라함의 계보를 잇는 선민으로 야곱까지만 해도 이방인과의 통혼은 엄격히 금하여 그 순수성을 보존하였다. 그러나 유다에 이르러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게 되고, 그 자손들도 가나안의 타락한 도덕성에 물들어 있었다. 유다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세 아들을 낳았다. 장자 엘을 위해 며느리를 들이는데 다말을 맞아들였다. 엘은 방탕하여 하나님께 범죄하다 죽었다. 무엇보다 성적 죄악이 크다. 또한 둘째 아들 오난은 자신의 땅이 형과 나뉘는 게 싫어서 형수 다말에게 계대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려고 땅에 설정하였다. 하나님의 진노는 저를 죽이셨다.
유다에게 셀라가 남았다. 다말에게 주기를 꺼려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이와 같은 불성실한 유다의 태도에 다말이 지혜를 내어 하나님의 뜻을 이었다.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창 38:14).” 계대를 잇는 결혼법은 저들의 민족성을 이으려는 관례다.
가문과 혈통을 중요시하는 민족으로,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신 25:5-6).” 이는 죽은 형제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그 정신과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윤리적인 문제를 운운하는 일은 그 의도를 와해시킨다. 이를 무시한 사두개인이나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주의 뜻을 알지 못한다. 본문은 우선 유다의 불성실한 태도를 지적한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11).” 또한 저가 상처(喪妻)하고 슬픔에 빠졌다가 정욕에 이끌리는 것을 본다.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11, 15-16).” 곧 우리의 본질적인 타락과 연약함을 보여준다. 다말은 비록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와 관계하여 자식을 낳으나 이는 그 계보의 소중함을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죄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선을 이루시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신다. 다말의 이름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른 것은 물론 저가 비록 이방 여인이나 주의 은혜가 크고 높으심을 알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저가 비록 창녀라 해도,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 하시며 정죄지 않으신다.
저들이 약속의 땅으로 받은 가나안은 향락과 이교도의 제의가 팽배한 곳이다. 이는 마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그 땅의 흙으로 사람을 그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22).”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
약속의 땅 가나안은 정복하고 다스림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기에 충만하다. 농경 생활을 하는 가나안 거민들에게 생산은 중요한 의미다. 저들에게는 생산을 주관하는 풍요의 신 ‘바알과 아스다롯’이 있고, 그 신전를 중심으로 성행위가 제의와 함께 자행되었다. 당시의 창녀는 우상을 숭배하는 데 있어 거룩하게 구별되는 신녀와 같은 존재였다. 저들에게 성행위는 종교적 제의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가나안의 종교적 타락은 선민 이스라엘(야곱)의 후손들을 여호와의 언약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런 가운데 유다를 위시하여 가나안과의 통혼은 민족성을 말살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순결을 간직하기 어렵게 하였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는 요셉을 그 형제들의 미움으로 애굽에 팔려가게 하시고, 저들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고스란히 옮겨 세겜 땅에 따로 구별하여 그 백성의 파멸을 미연에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에 따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야기는 앞장에 이어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당시 그 남은 자들의 죄악과 통혼으로 인한 민족성의 와해를 알리시는 놀라운 이야기 구성의 특징이 숨어있다. 곧 오늘도 우리가 타락과 부패로 그릇 행하여 하나님을 멀리할까 하여 주님은 그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하신다. 때로는 말도 안 되고 믿겨지지도 않는 어떤 일로 구성함으로 내가 누구인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책임과 의무를 잃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가령 어제 일 같은 경우도 놀랍고 감사하면서도 송구하고 그때마다 부끄럽다. 주의 은혜는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는 자는 없다. 은혜를 은혜로 여기는 데는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 그로 인하여 늘 부끄러움뿐이라는 사실 앞에서 주를 인정하게 된다. 신대원을 다니는 3년 내내 그러시더니 글방을 교회로 이루시는 데서도, 나 같은 자를 서둘러 목사로 세우시는 일에서도… 그때마다 마치 예방주사처럼 두 번의 낙방과 좌절이, 늘 와글거리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증발하여 사라지는 것 같이, 이게 뭐지? 하고 어안이 벙벙하여 주만 바라보게 하실 때였다. 자격도 안 되고 자신도 없어서 언제든 그만 둘 생각으로 휴학을 담보로 하고 신대원을 다닐 때도 매학기 등록금을 누군가의 손길로 채우셨으니…….
가끔은 나의 생이 간증이다. 온통 나의 이야기 같으나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세우시는 데 있어서도 가나안에 그대로 두시기보다 애굽으로 옮겨 구별하고 보호하심으로 그 민족의 구별됨을 보존하게 하신 것처럼… 그 일에 앞서 늘 예방주사 같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죄악되나 하나님을 이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심으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신다.
이에 어느 훗날,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우리로 이를 인정하게 하시려고,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오늘 이 교회가 또는 나의 하루하루 사는 이 모든 날들이 주의 긍휼하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하여,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7-28).”
나는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주 앞에 늘 송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 17:1).
때론 지치고 힘에 겨워 하루가 참 길고 힘에 겨우나 그와 같은 한 날의 삶으로 감사하는 것으로 주의 영광이 되기를…. 아이가 질문하며 보낸 성경구절에서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39-40).” 누가가 특별히 삽입한 이 이야기의 의도를 더하여 묵상하게 된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내용이 언급되지 않았다. 누가만 이를 묘사하였다. 군중들이 외치는 예수를 ‘주’로 외치며 따르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항의하는 내용이다. 저들의 호의적인 감정이 행여 예수님의 신변에 물리적인 위협이 될까, 흥분한 군중을 자제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속내는 예수께 드려지는 칭송을 신성 모독으로 여겨 막으려는 의도일 것이다.
이때 예수님은 하박국 2장 11절 말씀을 인용하셨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합 2:11).” 곧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눅 19:40).” 곧 예수님은 우리가 오늘을 살며 간증하지 못할 때, 길가의 돌들이라도 외쳐 주를 찬송할 것임을 알게 하신다. 곧 저들의 찬양이 정당함 같이 오늘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면서 겪는 여러 일들 가운데 주를 인정하고 간증하는 일은 필연적이다. 이는 주를 따르는 자의 의무다. 슬프고 힘들고 때론 견디기 어려울 때도 찬양은, 우리의 간증은 선포되어야 한다.
이에,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3).
이를 위하여도 말씀으로 내게 선포해야 한다. 내가 일어나 불평과 불만으로 아우성치기 전에 말이다. 내가 찬양으로 선포하지 않으면 돌이라도 일어나서 찬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5-6).
그리하여,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15).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0) | 2024.08.30 |
---|---|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0) | 2024.08.29 |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0) | 2024.08.27 |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0) | 2024.08.26 |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0) | 2024.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