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08 주일
이사야 15장
모압을 위한 애가
사 15:1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들어가는 말
주변국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바벨론, 앗수르, 블레셋을 거쳐 이제 모압을 향한다. 모압을 향한 심판선언은 16장에서도 이어져 총체적인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상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악한 영들’을 통칭하는 ‘모압’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곧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단순히 돈이나 건강, 자녀 문제가 아니다.
‘모압’은 오늘 우리가 같이하는 여러 상대들을 의미한다. 심지어 우리 속의 ‘죄의 속성’도 포함된다. 바울의 절규처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20).” 이에 우리가 당시 이스라엘과 모압의 관계성을 찾아보면 그 의미는 더욱 뚜렷해진다.
본문이해
1. 역사적 배경
모압은 이스라엘과 지리적으로 인접했고, 혈통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예들이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탈출하여 두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후손들이 ‘모압과 암몬’이다.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창 19:37-38).” 저들은 주전 13세기에 사해 동쪽 구릉지대에 세워졌다. 혈통적으로도 가까운 ‘모압’은 항상 이스라엘을 적대시하였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머물 때도,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민 25:1).”
또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사사 시대에도 18년간 모압은 큰 고통을 주었다.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그렇게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그러하였다(삿 3:12-13).
결국 ‘모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 주변 상황으로 자녀들을 일깨우신다. 사울 왕 때 잠시 모압을 정복한 적 있고, 다윗 왕 때 완전히 이스라엘에 복속시켜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그들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들이 다윗의 종들이 되어 조공을 드리니라(삼하 8:2).”
이스라엘이 분열한 후 모압은 아합 왕 때까지 북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었고, 아합 왕이 죽은 후 잠시 독립하였다가 여호사밧 왕 때 다시 굴복하였다.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왕하 3:5, -27).”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후 시대 후에 그 지배권을 상실하였다(10:32). 그때부터 모압은 과거에 지배당했던 시절에 대한 앙갚음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요단강과 사해 동편의 땅을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을 침략했다(13:20).
이러한 상황은 앗수르의 디글랏 왕이 북이스라엘을 침략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주전 722년에 사마리아를 함락시킨 앗수르의 사르곤 왕은 아라비아까지 원정하여,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모압의 전 영토를 정복하였다. 원래 모압은 유다와 블레셋(아스돗)과 함께 친앗수르 정책을 펴며 동맹을 펼쳤었다. 그러다 앗수르의 세력이 잠시 약화된 틈을 타서 주전 712년경에 아스돗이 주도하여 결성한 대앗수르 동맹에 가입했다가 앗수르에 의해 보복 당했다.
2. 모압의 속성
이상과 같은 모압의 역사적 배경은 오늘 날 우리 자신 속에 죄를 짓게 하는 ‘모압의 속성’이 있음을 깨닫게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곁에서 항상 우리로 죄에 둔감하게 하는 인간관계나 풍습, 문화, 유행 들이 있다.
오늘 이사야는 그러한 ‘모압’의 멸망과 파멸을 일깨우며, 저들이 처하게 될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육 당할 것을 예언한다. 오늘 15장과 16장으로 이어지는 ‘모압’은 주의 뜻을 전하는 동시에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조명하게 한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의 시선도,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의 자고와 오만과 자랑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 그러므로 내가 모압을 위하여 울며 온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으리니 무리가 길헤레스 사람을 위하여 신음하리로다(렘 48:29, 31).” 저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3. 모압에 대한 애가
오늘 본문과 16장으로 이어지는 내용은 애가, 곧 저들을 향한 슬픈 노래라 할 수 있다. 곧 모압에게 임할 심판의 비참한 결과를 놓고 애가로 진술한다. 16장에서 이 예언은 더 강하여질 것을 알리듯 오늘 본문에서 알 모압, 길 모압, 바잇, 디본, 느보, 메드바, 헤스본, 엘르알레, 소알, 에글랏 슬리시야, 루힛, 호로나임, 니므림, 에글라임, 브엘엘림, 길하레셋, 십마, 야셀 등 약 20여 곳의 지명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전역에 미쳤음을 알린다.
또한 동양적인 관습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타난다. 이사야는 모압의 파멸로 인하여 백성들이 통곡할 때, 각각 머리털을 밀고 수염을 깎고 굵은 베로 몸을 감싸고 지붕 위에서 애통했다고 묘사한다. “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는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카락을 밀고 각각 수염을 깎았으며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사 15:2-3).” 이러한 풍습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고대 근동에서 비슷하게 곡을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재앙과 진노로 저들의 슬픔을 이방인의 풍습을 따라 소개함으로 그 비참한 심판을 극대화한다. 저들이 산당에 올라가 슬피 우는 소리, 파괴된 성읍을 위해 통곡하는 소리, 전사의 울부짖음 등 슬픔을 청각적으로 영상화하면서 실제 우리 삶에 이와 같은 심판으로 겪게 될 형벌의 고통이 실제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한가를 알게 한다. 뿐만 아니라 심판을 피하여 도망하기 위하여 황급히 비탈길을 오르는 모습, 공포에 질린 전사의 모습, 오랜 가뭄으로 니므림의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자연적 비참한 현실이 어떠한가를 총체적으로 알린다.
4.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모압의 파멸이 목적이 아니다. 16장에서,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 실과, 네 농작물에 즐거운 소리가 그쳤음이라(9).” 이어서 “이러므로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 내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11).” 하는 선지자의 마음이 곧 주의 마음이시다.
이는 오늘 날 죄악 가운데 고통당하는 제3 국가들의 비참함이나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희생을 우린 안타까워한다. 같은 사람으로서, 심지어는 예수님의 계대를 이었던 룻의 동족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룻 1:4).” 룻은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마 1:5)”
저들이 돌이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저들이 이방 족속이나 ‘모압’에 대해 깊은 슬픔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이에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설령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는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5.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깨어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가 앞서 주 앞에서 항상 깨어 있어 심판의 때를 대비한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마 24:42-43).”
이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모압’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때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나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정신 나간 교회에서는 더러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하며 지옥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내세워 지옥을 부정한다. 더 나아가 ‘예수 이름으로’ 외에도 구원의 길은 있다고 한다. 점점 더 천주교의 교리를 따르며 온 인류의 평화와 종교화합을 외친다.
이에 우린 설령 배타적이라 해도,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1-12).” 그런데 점점 다양성을 운운하고, 인권을 내세워 죄를 ‘심신미약’으로, 틀린 것을 서로가 ‘다른 것’으로, ‘그럴 수 있는 일’로 호도하는데 끌려가서는 안 된다. 위로랍시고, ‘네 잘못이 아니야!’ 하고 죄를 두둔하면 저들로 회개할 기회마저 빼앗는 것과 같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교인들이 늘어간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우리 안의 ‘모압’도 너무 많은 게 얽혀있다! 가족으로 혹은 사랑하는, 존경하는, 개인적 취향으로, 자유의지를 운운하며…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4:3-4).”
나오는 말
오늘의 ‘모압’은 우리와 친분이 깊다. 저들이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할 때 우리 역시 외면하지 못하고 저들 슬픔에 따라한다. 인간의 도리를 운운하며 곡하는 시늉을 하면서라도 제사에 참여하고, 슬픔을 위로하는 ‘씻음 굿판’에 머리를 조아린다. 가령 사회적 참사 때 문화에 따라 ‘살풀이’니, 원혼을 달래는 굿판을 공개적으로 연다. 이는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관례이고 문화이고 풍습이다. 토속적인 신앙이다.
어느 정신 나간 목사는 각 나라의 토속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외친다. ‘사람의 도리’을 운운하며 사람들이 열광한다. 이를 또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여, 인류애와 민주주의의 기본권을 내세워 상대를 공산주의, 좌익으로 몰라 사탄의 권세라고 규정한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열두 지피가 가나안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요셉을 앞세워 애굽으로 보내시고, 그곳의 총리로 세우신 뒤 이스라엘 70명을 애굽 땅 고센으로 옮기셨다. 후에 저들이 또 애굽화 되어 420여 년을 노예로 살게 하다 출애굽 시키셨다.
이상과 같이 우리 안의 ‘모압’은 시시각각 우리로 주께 범죄케 한다. 오늘 이사야는 이를 애가의 형태로 서술하며 슬피 노래한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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