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전봉석 2024. 9. 7. 02:06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창 48:15-16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시 27:13-14

 

 

야곱을 정점으로 하여 ‘이스라엘’은 큰 족속을 이룬다. 야곱이 병들어 요셉의 두 아들에 관한 상속권을 인정한다. 임종을 앞두고 요셉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전수한다.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함으로 ‘언약 공동체’로 삼는다. 하나님의 언약은 분명하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26:4).”

 

또한,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14-15).”

 

야곱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움을 알고 요셉에게 진정 하나님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도록, 수년이 흘러 구세주로 오실 예수를 바라보며 요셉을 믿음의 영적 지도자로 세운다. 하나님은 요셉의 신앙을 본받은 이스라엘 후손들만이 전적인 은총을 받을 적격자로 공표한다. 야곱은 열 두 아들을 축복하기에 앞서 요셉의 두 아들을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 인정하며 축복한다.

 

죽음을 예견하고,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47:29).” 가나안 땅과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46:3-4).”

 

하나님이 함께 하기를 누구보다 간절하게 간구하였던 야곱이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32:22-28).

 

이내 이스라엘이라 이름하는 야곱으로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시며 넉넉히 채워 주시는 축복을 확신하는 삶이었다. 이제 임종을 눈앞에 두고 야곱이 남기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셨다’는 일생의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보배로운 ‘여호와 신앙’을 간직하고, 이것이 야곱을 이스라엘 민족의 족장으로, 믿음의 선조로 만든 원동력이다.

 

오늘을 살면서 이와 같은 말씀이 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린 늘 말씀 앞에 선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 4:8-9).”

 

곧 하루하루의 삶이 간증이 되고 주와 동행하는 날들이 된다. 나는 늘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자이나 그때마다 주의 손길이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체험한다. 가령 어제는 뜬금없이 자동차 회사로부터 리콜통지가 문자로 왔다. ‘흡기 다기관 엔진제어장치 모듈’를 무상으로 교체해준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더니 언제부턴가 엔진경고등이 켜지고, 매연 여과장치인 무슨 장치의 경고등으로 계속 문제가 되면 2백여만 원을 들여 교체해야 한다고 했었다. A/S 기간이 지나 어찌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에 아무튼 신경 쓰며 타고 있던 터라, 뜬금없이 그 기간에 제조연월일이 내 차량도 포함되어 다음 주부터 예약 후 무상으로 교체를 한다고 하니….

 

앞서 교단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후원헌금과 에어컨 문제로 옆 사람과 서로 마음이 불편하였는데 그 문제도 잘 해결이 되었고… 자동차 사고로 오히려 평소 아픈 곳을 물리치료와 주사치료를 받으며 관리 받게 하심도 그렇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에 있어,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일련의 불화로 조용히 교회를 이사할 생각으로 알아보면서도 나의 기준은 새벽에 이처럼 마음껏 나와 묵상글을 쓰고, 주의 집에 거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여 나는 더욱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그러므로 형편이 안 되고 나의 능력이 모자란 것도 복이다. 만일 내가 알아서 내 능력껏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 별로 큰 어려움이 없다면 오늘처럼 주의 내밀하신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간증하며 살 수 있을까? 우리의 간절함은 절박한 데서 오고 절박함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처지와 상황 속에서 애통해하는 마음에서 온다. 그래서 바울 사도의 고백이 신앙의 진수라 여겨지는 것은 ‘나의 약한 데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남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어려움, 그 마음의 깊은 상념을 주 앞에 아뢰며 엎드릴 때 오직 주의 은총으로만이 이를 채울 수 있고 함께 하심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곧 나 같은 죄인을 그토록 사랑하심으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13:12).”

 

이를 오늘 요셉과 그의 아들을 앞에 두고 야곱이 주께 고하는 축복의 기도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창 48:15-16).”

 

오늘을 살면서 나는 연약하고 부족하나 그리하여 주가 나를 이끄시고 보호하심이 확실한 것을 순간마다 경험한다. 이를 오늘 시편의 기도와 찬송으로 읊조리면,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27:13-14).

 

다들 저마다의 생각으로 옳다하며 살아갈 때 나는 나의 연약함으로 주 앞에 엎드릴 뿐이다. 어떤 날은 몸이 틀어진 듯 등짝이며 어깨며 허리가 각각 다 아플 때, 속수무책으로 누구와 어떤 일로 갈등이 생겼을 때, 더는 어찌할 수 없어 물러서고 내가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때… 주는 내가 보이신다! 안달을 하다 그치고, 마음에 여러 갈등으로 시달리다 주 앞에 내려놓고, 그저 다만 주의 이름을 부를 때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주의 손길이 나를 붙드심을 느낀다. 다소 의아하고 이상하고 느닷없어 당황스러울 정도로… 나의 하나님은 나를 놀라게 하신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삶이란 나의 약함으로 주만 바랄 때이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이에 대해 누가 무슨 말로 반론할 수 있겠나?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이에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3).” 고로 나 같은 쓸모없는 그릇으로도 주가 사용하심으로 귀한 날들이 담겨지는 것을.

 

이와 같이 나는 본래 역사의 맨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출발한 자는 아니었다 한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 4:8).” 하여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이제는 안다. 누구보다 먼저, 역사가 시작되기 그 전부터,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이 놀라운 진리와 그 사실 앞에 나는 이제 감사할 뿐이다. 나는 한 게 없고, 하는 것도 마땅치 않으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를 나는 이제 전심으로 사랑하며, 내가 남은 생에 바라는 한 가지 일, ‘나의 평생에 여호와의 전에 살면서 주를 바람이다.’ 더는 세상 즐거움 다 잃는다 해도,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33:6-9).

 

이를 인정하는 데서,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 이와 같은 말씀으로 나는 이제 주 앞에 엎드리며,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7:1).

 

그때마다 더욱 주를 바람이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4).

 

부디 나의 남은 생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9).

 

하여,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13-14). 아멘.